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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Oct 24. 2024

타인은 지옥인가? 구원인가?

구원의 정체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심리 상담을 시작한 건 2021년 9월쯤이었다. 처음에는 주1회씩 상담을 진행하다가 지금은 2주에 1회씩 선생님을 만나고 있다. 상담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났을때 쯤 고비가 왔다. 나의 슬픔과 고통을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다가 차츰 모든 것이 분명해지자 지옥문을 열고 나온 것처럼 후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더 이상 나를 탓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깊은 슬픔과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바꾸지 못하는 그 과거의 결과물로 여전히 나는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또 다른 거대한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고, 나는 다시 무력해졌다. 매번 그 거대한 문을 열어 보려고 애써봤지만 열릴 것 같지 않았고 인내심이 바닥 나 그 문 앞에서 주저 앉았다. 그렇게 나는 1년 남짓 진행 해오던 상담을 그만 두었었다.


내가 느낀 가장 큰 무기력의 정체는 '남편'이었다. 나의 구원환상으로 만난 남편은 내가 구원해야 할 인생의 난제같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그토록 끌린 것이 그가 나에게 끌린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절망이 밀려왔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원받길 원했지만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 채 어찌저찌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언의 약속처럼 '아이들 인생을 망치지는 말자'는 것이 우리가 함께하는 유일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일테니 우리는 그것에 철저히 동의하며 부모로서만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같이 사는 이유를 빼고는 모든것이 달랐던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구원과는 점점 멀어져갔다. 늘 문제를 회피하는 남편과 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려는 나는 우탕탕탕 시끄러운 소음을 내곤 했다. 그 소음을 최대한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시작부터 어긋난 이 관계에도 답이 있길 원하며 상담을 받았지만 나 혼자 상담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부모와 나의 애착이 남편과 나의 애착을 결정하고, 남편과 나의 애착이 자식과의 애착에 영향을 준다. 결국 부모복과 남편복은 연결되어 있고, 남편복은 자식복과 연결되어 있으며, 자식복은 결국 부모복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가족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이 결혼 생활이 너무도 버거웠다. 결혼 생활에서도 여전히 난 혼자였다. 상담을 그만두고 남편에게 상담을 받기를 권했지만 남편은 상담 자체를 의심했다. '해서 나아지겠냐'는 말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면 더 큰 절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결심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구원자 노릇을 하지 않겠어"


나의 선언이 말뿐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전에도 나는 수차례 남편에게 나는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낳지 않았어. 제발 이젠 나에게 그만 의존하고, 자신의 일은 알아서 하면 좋겠다고 절절하게 외쳐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똑같이 남편을 내 아이들 챙기는 것처럼 챙기며 잔소리를 했다. 돌봄을 멈추지 않는 나의 이야기에 남편은 귀를 기울이지도 행동이 변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건강하게 돌보지 않는 남편을 비난하면서 어쩌면 난 저 깊은 마음에서는 안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 역시 이 사람은 나 없으면 안돼"


그렇게 난 '나없으면 안되는 사람'에게 끌리는 구원환상 감옥에 갇혀 버린 것이다. 제 무덤은 자기가 판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나의 무덤을 더 깊고 깊게 팠다.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을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나 자신'이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내가 이 사람을 버리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혼만이 답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래봤자 나는 또 다른 구원자를 찾거나, 또 다른 구원자 노릇을 할게 뻔했다. 그에게 변하라고 외치는 것이 구원자를 원하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진정한 구원이 뭔지도 모르면서 구원을 원하다니, 그걸 모르는 상태였기에 끝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삶의 목표로 30대의 전부 그리고 40대의 절반을 살아왔고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들의 결점도 받아들이며 성장하려고 애쓰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아이들이 되었다. 내 아이들은 인생을 슬프다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 세상을 안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나의 공허함은 여전히 나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했다. 자식을 나와 같이 키우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뿌듯함과 별개였다. 남편은 더욱 더 나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사실이 괴로웠다. 그 역시 내가 보호해야할 어린 아이같았다. 그 사실이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나혼자 상담을 해봤자 이 결혼 생활을 끝내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상담을 그만두고도 이혼을 결심하진 않았다. 내가 이토록 끈기있는 사람인가 싶게 나는 다시 남편과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구원환상이 있는 나와 타인에게 심각하게 의존하는 남편과의 악순환의 고리를 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같은 자리를 늘 맴돌기를 반복하는 일상이 한동안 이어졌다. 나의 무의식이 그토록 원했던 절대 날 버리지 못할 사람과 함께하는 셈이지만 그는 진정한 나의 구원자는 아닌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담 자가예프스키(폴란드 시인)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결국 나는 상담을 그만둔지 3개월만에 다시 같은 선생님과 상담을 재개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감정 중 하나가 '부모를 사랑하고 죽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부모에게 내가 그랬듯이, 나 역시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과 상담을 그만두고 나서 계속 선생님이 그리웠다. 어쩌면 부모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정체는 이런 것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
 있는 그대로의 수용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


그렇게 나는 만 3년이 넘는 지금까지 2주에 한번 선생님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는 내 마음 속의 엄마가 되어 주었다. 타인은 분명 타인을 지옥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을 구원할 수도 있는 것도 역시 타인이라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만난 가장 안전한 사람이며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나의 부모와 남편에게 원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내가 진정 원하는 구원과 행복의 정체는 이런 것이다.


타인의 필요나 인정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때론 못나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더욱 사랑받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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