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딸과 아들은 이제 열 일곱 살, 열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들은 곧 고3, 고1이 된다. 여전히 내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육아와 교육에 몰두하는 이 시간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을 지나서 이제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아졌고, 내가 개입하면 갈등이 되거나 아이들의 홀로서기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잦아진다. 그래서 가급적 요즘 나는 '물러서기'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중이다. 그렇게 가만히 물러나 있으며 지금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를 돌아보고 있다.
엄마.
이 두 글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아주 특별하다. 특히 인간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유독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매우 길기때문이다. 보통 인간의 양육기간은 20년이니, 자연적으로 엄마에게 받은 유전자뿐 아니더라도 엄마의 말과 행동들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짧게는 2주만에 어미에게 강제로 떨어져 팔려가는 강아지부터, 1개월에서 3개월안에 양육을 끊내고 독립시키는 조류들, 사자도 1년 길게는 2년이면 양육을 끊내고 독립시킨다. 인간과 가까운 오랑우탄도 길어야 2년 정도 양육을 하고 홀로서기를 한다.
우리 나라는 대학 진학률이 80%에 이르고, 대학 교육까지를 부모의 책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자녀 양육의 시간은 4년 더 길어진다. 또 경제가 불황일때는 취업이 되지 않으니 독립하지 않고, 취업을 하더라도 고물가에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자식들은 독립하지 않는 분위기다. 게다가 결혼할 때는 결혼 자금을 보태줄뿐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또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아이도 부모에게 맡기기도 하니 '평생 육아'를 해야하는 게 우리나라 엄마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엄마의 관심과 사랑은 한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사정이 이렇다보니 젊은 사람들이 부모되기를, 엄마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지금이야 결혼이나 아이 낳는 것을 선택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지만, 나는 사실 아이 낳는 것이 선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행위니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눈에는 아기들이 참 예뻐보였다. 지금도 지나가는 유모차에 탄 아기들과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어준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아고 예뻐라~"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딸과 아들을 키울때는 정작 예쁘다는 말을 많이 못해준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난 왜 그렇게 내 아이들의 '예쁨'을 놓치고 살았을까?
돌이켜보니 나는 전쟁에 나가 나라를 구하는 장수와 같은 마음이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 나때문에 태어난 이 아이들을 지키고 잘 자라도록 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넘어서 '기필코, 이 과업 해내고야 말겠다'는 비장함으로 무장한 장수가 되어 살아왔다. 그 비장함에 가려져 정작 하루하루 그때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예쁨'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첫딸을 임신한 순간부터 내 삶의 목표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유년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내 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내게 아이를 낳는 건 생명의 본능이었고, 잘 기르겠다는 건 내 상처에 대한 교훈이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실 아이들을 위함이 아니다. 내 결핍과 상처를 위한 자가치유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서른에 엄마가 되고 육아와 교육에 대한 공부를 새롭게 해나갔다.
'절대 나처럼 슬픈 인생을 살게 하지 않을 테야'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서게 되자, 몹시 두려워 자주 잠을 설쳤다. 더구나 개인적인 유년의 경험들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지라 아이들 인생을 내가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을 왜 낳았냐고 , 왜 더 사랑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미워하듯이 내 아이들이 날 미워하게 될 까봐 그래서 난 또 혼자가 될까봐 두려웠다.
아이들에게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해주고, 값나가는 물건들을 사주고, 학원을 보내 공부를 더 잘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그것들은 내 경험이 주는 교훈에 의하면 본질적인 것이 아니였다. 나를 비롯하여 주변의 지인이나 친구들 중에 유년의 경험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고통은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수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와 내 가까운 사람들의 인생이 슬펐던 것은 부모가 제대로 보호하거나 사랑해주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같이 놀아주고 책을 읽고, 틈틈히 여행을 했다. 다양한 음식들을 직접 요리해주었다. 특히 철마다 나오는 가장 좋고 탐스런 과일을 사 먹였다. 좋은 걸 먹어야 좋은 걸 고를 수 있고, 좋은 걸 가져본 사람만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걸 알려주는 가장 직관적인 것이 나는 음식이고 과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음식으로 내가 준 사랑을 기억하고 기준 삼았으면 했다. 그 기준이 없어서 나에게 함부로 해도 모르고 아무나 사랑하던 지난 날의 내가 가여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게 엄마의 사랑이고 기준이니 엄마 주던 과일 이하로는 쳐다보지도 말아라.
'애정결핍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다면 부모 역시 자신의 부모를 잘못 만나 그렇게 된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잘못된 육아는 계속 되물림되고 악순환을 겪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없이 부모가 되곤한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대로 돌려주고, 본 대로 따라하고, 들은대로 아이에게 말하면서 그릇된 방식의 육아를 되물림 한다. 정작 자신도 고통받았으면서 그 고통을 물려주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책하고 후회하고 때론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결국 마주해야 현실은 열과 성을 다해 아이를 망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자기 혐오가 빠지고 만다. 나 역시 너무도 뻔하게 그런 굴레를 반복할 수 있었다. 나는 적어도 내 부모가 내게 했던 것처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사실 별로 없다. 의지와 결심만으로 모든 게 이뤄진다면 세상에 원하는 것은 다 내 것이 되었겠지. 무책임한 아버지처럼 될까봐 무관심하고 냉랭한 어머니처럼 될까봐..나의 부모처럼 될까봐 늘 두려웠다.
받은대로 돌려주고, 본 대로 따라하고, 들은 대로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막연하게 '좋은 엄마'가 되야지 결심하고 시작한 공부였지만 정작 방법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육아 경험을 담은 개인의 에세이들을 보면서 사례를 모았다. 뿐만 아니라 오은영 박사님의 초창기 육아 솔루션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전편을 다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소아 정신과 의사들이 쓴 육아 전문 책들을 보면서 지식을 쌓아갔다. 또 거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다양한 심리서적과 교육 서적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점점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해 철학서적들까지 탐독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인사이트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아주 단순한 것들만 남았다.
부모가 아이에게 하면 절대 안되는 행동 원칙 3가지와 아이에게 해야하는 행동원칙 2가지가 그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3가지는 아이를 버리고, 학대하고, 방임하지 않는 것이다. 학대에는 육체적인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에게 해야 하는 행동 원칙 2가지는 만10세 미만에는 절대적 보호와 사랑을 주고, 만10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서서히 자기 일에 관해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나 누가봐도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부모의 기호나, 불안과 상관없이 허용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나가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깊게 새겨진 나의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가치관과 편견들, 그로 인해 생긴 내 마음의 습관과 그 마음의 습관으로 생긴 행동 습관을 버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힘이 들었다. 아이들을 향한 무의미한 걱정과 잔소리, 타성적이고 관성적으로 내 뱉는 각종 지침들에 스스로 진저리쳤다. 이것은 나란 사람을 통째로 갈아 엎는 일이었다. 받은 대로, 본대로, 들은 대로 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내가 받고 싶었던 진정한 관심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수많은 밤과 낮을 고민했어야 했다. 그 고민들이 아이들의 성장에 거름으로 쓰이도록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나 자신을 먼저 성장 시켜야했다. 결국 육아는 아이가 아닌 나를 성장 시키는 시간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 성장의 실험도구였는지도 모른다.
딸이 열살이고 아들이 여덟살때의 일이다. 형제, 자매, 남매들은 1일 1싸움이 기본인 듯 자주 다툰다. 내가 학생들과 수업을 하던 도중 우리 아이들이 밖에서ㅈ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게 일상이다보니 웬만해서는 내가 나서지 않고 모른척 한다. 그러다보면 저희들끼리 합의도 보고 어찌저찌 싸움을 마무리 하는 게 보통이라 이번에도 그럴거라 예상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싸움은 길어지고 강도는 세지고 있었다. 나는 수업하던 도중에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에게 갔다. 손에는 주방에서 쓰는 나무 볶음 주걱이 들려 있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만 싸우라고 명령하고는 엉덩이를 한대씩 때렸다. 계속 싸우면 또 맞을 거라고 엄포를 놓고 다시 수업을 하러 갔다. 나에게는 그게 가장 빠른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 그리 세지 않았고 딱 한대였으니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주방에 있어야 할 그 조리도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뿐 아니라나무로 된 조리 조구들이 몽땅 없어졌다. 너무 이상하여 가족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 구나 싶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오전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패브릭 소파 커버를 벗겨 빨 생각으로 소파를 정리하는 도중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소파 방석과 틀 사이에 나무 주방 도구들이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엄마가 소파 청소하다가 나무 주방 도구를 찾았다고 하자, 딸은 자기가 숨겼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날 맞은 엉덩이 한대가 너무도 무서웠다고 했다. 나의 급한 사정이 어찌되었든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아이들을 절대 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때때로 아이들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그 어떤 변명을 하지 않고 너무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부모를 무섭게 닮는 아이들'
오랜 시간 내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면서 천착하여 고민했던 몇가지 질문들이 있다. 수 많은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들을 만나면서 세뇌와 교육의 차이가 뭔가에 대한 의문. 사랑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가하는 문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하는 깊은 회의.
내가 본 아이들은 좋든 나쁘든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착실히 길들여져 갔고, 자신들의 부모의 눈빛과 말투까지 고스란히 닮아갔다. 선천적으로 남다른 특징이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예외로 두고 일반적인 경우에 대체로 그러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지독히 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