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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Oct 13. 2024

아주 오래된 습관- 구원환상

버림받지 않으려면 구원자가 되라!

영국에 주디라는 고아가 살았다. 고아원 원장은 애벗이라는 성을 전화번호부에 등장하는 첫번째 성에서, 이름은 묘비에서 본 이름을 따와 주디에게 '제루샤 애벗'이라는 본명을 지어준다. 주디는 그렇게 형편없게 지어진 자기 이름이 싫어 그 본명을 두고 고아원 동생이 '제루샤 애벗'의 발음이 잘 안되어 부르던 '주디'라는 이름을 애칭으로 쓴다. 그녀는 이미 나이가 차서 고아원을 나가 독립을 해야하지만 고아원의 일을 돕는 대가로 그곳에서 더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주디가 가장 싫어하는 날은 한달에 한번 수요일마다 고아원을 사찰 나온 평의원들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 날은 새벽부터 아이들을 씻기고 예절 교육을 시키고 평의원들을 대접할 간식을 만드느라 학교도 빠져야한다.


그런데 가장 고단한 어느 수요일에 뜻하지 않은 행운이 주디에게 찾아온다. 평의원 중 한 사람이 주디가 쓴 글을 우연히 읽고 작가 소질이 있다면서 대학 교육을 시켜주는 것은 물론 졸업때까지 매달 넉넉한 용돈을 준다는 것이다. 조건은 딱 하나, 글쓰기 연습도 할 겸 한달에 한통의 편지를 자신에게 쓸것, 대신 답장은 바라지 말것!


하지만 평의원은 주디를 직접 만나주지 않고 진짜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가짜 이름으로 자신의 은인을 부르기 싫었던 주디는 호칭을 고민하다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스치듯 그 평의원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자동차 불빛에 비친 림자가 길쭉하게 드리워졌던 것을 떠올리며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기로  것이다. 그렇게 주디는 자신의 가능성알아봐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 대학을 가게 되고,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데, 알고 봤더니 그가 바로 자신의 구원자인 키다리아저씨였다는 해피엔딩.


이 소설은 아주 오랫동안 나로 하여금 '키다리 아저씨'를 꿈꾸게 하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한참을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인생의 구원자가 나타나길.....간절히 바라고 또 원했다.


 

어린 시절에 제대로 받지 못한 보호와 돌봄으로 마땅히 채워야할 의존욕구를 채우지 못한 나는 항상 심리적 허기에 시달렸다. 배가 불러도 배가 고팠다. 어죽은 귀신 마냥 나를 보호해줄, 아니 구원해줄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며 찾아 방황해야 했다.  스스로 나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은 타인에게 받는 것이지 자신에게 줄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내겐 괴상한 농담 같았다.


그런 나는 신기하게도 진정한 구원자를 찾기는 커녕  철저히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자 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친구든 연인이든 만나는 모든 의미를 두었던 인간 관계에서 나는 그들의 구원자 노릇을 자처하며 그들의 문제를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해결하려 애를 썼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열정을 쏟아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자'인데,

나는 왜 '타인의 구원자'가 되어 살아 갈까?


이런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슴이 시키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문제 있는 인간들에게 꽂히고  밝고 건강한 인간들을 보면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게 그들은 너무도 평범했고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반면 그늘지고 우울하고 위태로운 인간들을 보면 반가워 그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들과 나는 뭔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어느새 나는 당연하게도 그들의 고단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하며 나의 에너지를 쏟아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런식으로 난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VIP가 된 것이 뿌듯했다. 나로 인해 그들의 인생이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분명 이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안된다. 나의 심리 구조가 몹시 궁금했고 그렇게 나는 나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구원환상을 갖게 되었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꿈인 적이 없었는데도 20년이 넘게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것도 그래서일까?처음 10년은 입시를 가르치는 국어강사로, 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부터 지금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때론 책을 읽어주고, 매일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며 글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더 나아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궁극의 목적은 '자신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세상에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자신을 잘 알게 되면 선택이 쉬워지고, 선택을 잘하는 인간은 세상살이가 비교적 쉬워진다'고 가르친다.


학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책을 읽혀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아이들은 엄마 손에 끌려와 내게 오지만 나는 그들의 욕망보다 실은 더 큰 야망을 품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잘 읽도록 해서 입시지옥에서 헛된 고생을 하지 않도록 구원하리라는 비장함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비장함은 부모들의 피드백을 통해 충분히 내가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 그들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에 만족을 얻었다.


하지만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었는가는 다른 문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 주변인들을 구원하느라 정작 나 스스로를 빈번히 소진시키고 있었다. 스스로의 구원에는 소홀한 채 타인을 구원하는 일이 나의 구원이 되길 바라면서 번아웃이 오길 반복하는 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믿고 있던 그 신념에 가까운 서사를 붕괴시켜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그러했고, 미녀와 야수가 그러했고, 키다리 아저씨가 그러했다. 불우한 처지의 타인에게 헌신하면 그 타인은 성장하여 그 불우함을 이겨내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공을 구원자에게 돌리며 해피엔딩이 되는 그 서사... 사실 난 그런 서사에 몹시도 끌렸고 내 삶도 그런 서사와 같은 엔딩이 될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를 버려두고 타인을 구하는 일은 이야기와 달리 현실에서는 끝이 아름답지 못하다.  더구나 나는 누구의 인생을 구원할 주제나 처지도 되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완벽한 구원을 원했던 것 같다. 내게 완벽한 구원은 '버림받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절대 날 버리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어린날에 형성된 나의 무의식은 더 나아가 평범하고 밝은 사람들, 또는 잘나고 유능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내가 필요없어지면 날 떠날 거라는 무의식을 형성했다. 그러니 절대 날 떠나지 못할 사람들을 찾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버림받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던 것이다. 나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방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문제적 인간일수록 반갑고 좋을 수 밖에. 내가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고 그들은 내가 더 절실히 필요할테니...그럼 날 절대 버릴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생존 방식을 구축했다. 브라보!

말했듯이 이건 내가 의식하고 한 행동이 결단코 아니다. 선택했어도 내 진짜 선택이 아니었다. 어떤 머저리가 일부러 문제있는 사람만을 찾아 관계를 만든단 말인가. 결국 그 관계의 끝은 모두 '파탄'으로 마무리되는 것을....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관계를 일부러 찾아 열과 성을 다할리가 없지 않은가.


이 지독한 저주의 비밀을 상담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고, 그 비밀이 풀리는 순간 잠깐 해방감이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제껏 내가 맺어온 관계들이다. 그런식으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로 주변을 구성하고 있었고, 또 하나같이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이제까지의 내 삶을 모두 버려야 하나? 삶을 '리셋'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공허감이 몰려왔다. 리셋이 가능하다면야 그렇게 하면 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인생을 복원해야 할지 어리둥절하고 황망하기만 했다.


무기력해진 나는 익숙하게 다시 어린 시절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 나의 인생을 저주했다. 빌어먹을 결국 모든 것은 그날에서 시작하는 구나. 내가 증오했던 것도, 내가 사랑했던 것도, 내가 꿈꾸었던 것도....결국 모두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곳으로 귀결되는구나.....그런 내 인생이 싫었고. 난 어느새 버림받은 아이에서 저주 받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다른 삶을 살려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려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하고 생각했다.


구원을 받고 싶으면 진짜 구원자가 되어 줄 건강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마땅한데도 그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만 만나온 이유를 알아도, 그 모든 나의 진실을 알아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이 찾아 왔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미 이렇게 살아왔는데 다시 모두 갈아 엎으란 소리로 들렸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답답했고, 이미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데 내 에너지를 써버려 정작 날 구할 타이밍이 왔는데도 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었다. 내 모든 것이 소진된 채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나의 생모와 아버지를 더 깊게 증오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오지 않는 엄마를 목이 쉴때까지 울어 제끼는 갓난 아이가 되어 그렇게 나의 탄생에 일조한 무책임한 두 인간을 저주했다.


'지옥도 아까운 인간들 같으니....'




그래도 인생은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내가 내 을 버리지 않았다. 깊은 무기력에  스마트 폰으로 무의미한 숏츠를 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어느 찰나의 순간에  어떤 구원의 메세지를 동아줄 잡듯 잡았으니 말이다. 아무도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테니 난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그때, 그냥 표류하듯이 목숨부지할때까지 살아보자 했던 그때. 나는 나를 구했다.


" 속는 셈 치고 감사일기를 딱 일주일만 써보세요. 진짜 속는 셈 치고...딱 일주일만!"


월, 화, 수, 목 억지로 감사한 것들을 찾아썼다. 성에 차지 않는 감사함, 당연한 것들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는 걸 쓰면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다 금요일에는  쓸게 없었다. 내 인생은 고작 일주일도 채우지 못하는 감사함으로 이뤄졌다는 생각에 냉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금요일차 감사함을 억지라도 채워야했기에 한문장을 무심코 적다 무릎을 쳤다.


어쩌면 더 이상 누구를 구원하거나 내가 구원받지 않아도 괜찮겠다고는 생각을 했다. 내가 꿈꾸던 어떤것도  제대로 이루어진것이 없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지만 오늘도 별일 없이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금새 그건 억지 감사라고 폄하하려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말이야..


정말로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초라하고 남루하기까지한 이 평범한 일상이 정말 감사함이 아닐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원망을 하느라, 내 앞에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자꾸만 놓치는 현재에 내가 만족한다면...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별탈이 없다면... 나와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속는 셈치고 감사일기를 쓰고 있는 나를 봐주자. 더 이상 뭘 하지 않아도 나 좀 괜찮은 사람 아닌가.


그렇게 해서 쓰게 된 단 한줄이....그 뒤에 올 나의 모든 시간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늘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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