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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Sep 26. 2023

1.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엄마의 어린시절은 80년대였어.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시대였지. 한국은 유독 사회변화가 빠른 사회라고 하는데 정말 그래.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차가 유독 심하게 나는것 같거든. 그래서 세대 갈등이 많은게 아닌가 싶다. 서로 공유하는 경험이 다르니까. 다른 세상을 산 사람들이 서로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란 어려울거야


나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어. '국민의 기초교육을 베푸는 학교'라는 뜻을 가진 그 호칭이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1995년에 초등학교로 바뀌었어. 엄마가 초등학생때인 1980년대는 6.25전쟁이 끝난지 3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했고 어린 우리는 학교에서 빡센 세뇌 교육을 받았지.


바로 반공 교육. 국가가 주도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특정 이데올로기는 악마화하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교육이 아니고 세뇌야. 우리가 북한 주민들은 다 세뇌당했다고 비아냥 거리지만 실은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대를 지나왔단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엄마는 아직도 열두살 그날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헛구역질이 올라온단다. 북간첩의 날선 칼에 입이 찢기면서도 저 구호를 외치던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죽어가는 장면. 입안으로 피가 가득고여 처참하게 죽어가는데도 그 아이는 저 말은 반복했지. 엄마는 그 장면이 3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도 뚜렸해. 이데올로기에 다들 미쳐서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영화는 너무도 잔인해 정신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르던 시대였는지도 모르지만 말했듯이 아이들 인권은 그리 중요한 시대가 아니였으니까.  무장간첩에게 무참하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던 그 아이는 그렇게 반공주의 상징으로 죽어서 기억되었지. 엄마 기억에 그 아이의 동상이 학교마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해.

그래 나때는 '반공의 시대'였으니까.  반공 포스터 대회. 반공 글짓기대회. 반공 웅변대회와 심지어 월마다 반공회비라는것도 강제징수했지. 500원이었는데, 납부하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 한쪽 구석에 적어놓고 빨리 내라고 재촉하기도 했어. 그때 5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10개나 살 수 있던 돈이였는데. 엄마는 사실 그걸 왜 내는지 그 돈을 그 시절 정부는 어디에다 쓰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세금처럼 징수해갔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냈어. 그래 나때는 반공시대였으니까.


어느날은 9시 뉴스에서 정말 놀랄만한 소식이 전했어. 북한에서 금강산 댐을 건설할 계획인데, 북한이 금강산 댐을 붕괴시켜 200억 t의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면 서울 대부분이 물이 잠기고,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는 거야. 당시 정부는 북한이 이를 이용해 1988년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이라고 발표했지. 그 발표는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데 뉴스에 서울과 6.3빌딩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그림으로 만들어 화면에 띄워서 진짜 실감났어.


그 다음날부터 나라는 홀딱 뒤집혀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엄마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모여 겁에 질려 당장 그 계획을 철회하라고 외쳤던 기억이 나. 그리고 정부는 그런 국민의 공포심을 이용해 또 한번 대대적인 성금을 걷어들였지. 금강산댐을 막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모금을 시작했고, 정부는 막대한 돈을 걷어들이면서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에는 돈이 부족하다며 뉴스를 내보내곤 했어.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도 모두가 순진하게 속았던 그 시절. 지금도 앞으로도 국민을 위한 국가가 국민들 등쳐먹는 일은 없어야겠지. 그러니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투표해야해. 너무 엉터리같은 이야기들이라 거짓말같지.


얼마 전 외식을 하러 나가는 길에 어느 차량 뒷유리창에 낯설지 않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스티커 문구를 발견하고는 너희들과 함께 보고는 웃었지. 저런 걸 붙이는 사람도 웃기지만 저런 스티커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아직도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더 놀랐던 것 같아. 여전히 2023년 대한민국에 비극의 이데올로기가 좀비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에 씁쓸했단다. 우리는 언제쯤 완전히 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때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주입한 어느 한가지 사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어. 사상의 자유 그런건 없었어.

지금도 아마 누군가 '공산주의가, 공산당이 왜 나쁜가요?' 되물으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그런면에서 여전히 우리는 사상의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은 먼것 같구나.  

지금 생각하면 블랙코미디 같았던 반공 활동 중 재밌었던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삐라찾기'였어. 삐라는 전단, 광고용 포스터라는 뜻의 영어 표현 빌(bill)이 일본어에서 변형된 삐라라는 말로 통용되었는데, 삐라는 주로 정치적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때는 아마 북한이 자신들의 공산주의 체제를 선전할 목적으로 남으로 자주 날려 보내던 시절이었던 같아. 우리가 그걸 어디서든 찾아서 가져가면 학교에서는 학용품들을 포상으로 주었어. 투철한 반공의식을 갖춘 훌륭한 어린이라면서. 도시에서는 직접 경찰서에 가져다 주었다는데 엄마가 사는 시골엔 경찰서가 없으니 학교가 대신 했던 것 같아.


여튼 엄마는 투철한 반공의식은 둘째였고, 새 학용품이 갖고 싶었어.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산에가서 보물 찾기 하듯 삐라를 찾았지. 가슴이 두근대고 재밌었어. 그런데 막상 찾으려고 했을때는 보이지 않아 아쉽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가끔 산에 나물 뜯으러 갔던 할머니가 삐라를 주어다 주곤했어.


엄마가 기억하는 삐라는 인민복장을 한 사람들과 깃발 그리고 빨간색 글씨의 구호가 뭐라뭐라 적혔던 손바닥만한 종이로 기억해.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가는 학교 가는 길은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어. 뭔가 대단한걸 성취한 기분이었거든.


그렇게 물러가라 외치던 공산당인 북한과 우리는 여전히 대치중인 나라에 살고 있단다. 이젠 그들과 우리가 한민족인게 맞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아. 이래서 과연 통일이 가능은 할까 싶기도하다. 과연 통일을 하는게 맞기는 할까 의구심이 들기도 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런 노래를 가르치면서 , 한편으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를 외치게 교육을했던 참으로 모순적인 시대.

엄마 어릴적엔 그렇게 참 우스운 일들이 많았어.

나때는 말이야~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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