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방학을 하면 제일 먼저 생활 계획표를 짰어. 시계 모양의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밌었어. 그런데 실천 가능한 시간표를 짜는 게 아니라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정하고 작성하니 대체로 예쁘게 꾸미고 색칠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지.
나 때는 이 생활 계획표도 각도기를 가져다가 동그란 원을 직접 그려서 작성했어. 만족스러운 원의 모양이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여러 개를 그려보고 적당한 크기의 시계 모양을 그려냈지. 그리고 그 안을 아주 알찬 계획들로 채웠지. 물론 예쁘게 꾸미고 색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니. 원래 계획은 계획대로 잘 안되고 작심삼일이 기본 아니겠어?
엄마 어릴 적에는 방학 기간이야 지금과 같았지만 다른 게 있었다면 방학 숙제가 무지하게 많았다는 거야. 지금도 조금씩 숙제를 내주는 것 같긴 한데, 너희들은 한 번도 방학 숙제를 거의 한 적이 없었잖니? 숙제 검사도 설렁설렁하는 것 같고 검사를 해서 수행평가에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초등학교 수행평가가 그렇게 너희들에게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안 하는 애들이 많은 듯하더라. 그리고 너희 세대 애들은 어른보다 더 바쁜 방학을 보내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아예 방학 숙제를 내주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 어릴 적에는 방학 숙제가 많기도 했고, 안해가면 일단 맞고 다시 숙제를 해가야하는 상황이 벌어졌어. 그러니 어차피 할거 안맞고 해가는게 현명하잖아. 정말 다양한 숙제들이 있었는데, 곤충채집과 일기 쓰기. 만들기와 그림 그리기. 그리고 방학 탐구 생활이라는 작은 책자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 교과 내용을 연계한 글들이 있었고, 질문에 대한 답지를 만들어 열심히 적었던 기억이 나.
지고로 방학 숙제는 미리미리 하는 법이 없지. 개학하기 1주일 전 조금 더 미루면 3일 전부터 걱정 떠밀려 숙제를 하기 시작했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말이야.
"망할 놈의 방학 숙제"
특히 한 달 치를 한꺼번에 쓰는 일기장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어. 엄마의 창작 솜씨는 아마도 그 일기를 쓰면서 늘었던 게 아닌가 싶어. 그리고 그렇게 지어낸 엄마의 창작 일기는 늘 상을 받았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일기를 그런 식으로 썼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 따윈 없었어. 오히려 한 달 치 일기를 며칠 만에 몰아서 쓰느라 다양한 날씨를 지어내고, 한적 없는 일들을 만들어 내고 없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느라 창작의 고통을 느낀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어.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글짓기 대회에 나가 동시를 지어 상을 여러 번 받았어. 도대회에 나가서도 상을 받았으니 꽤 동시를 잘 썼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동시 짓는 실력이 다 저 방학일기 덕분이었다니까. 엄마는 일기를 지어 쓰다 쓰다 쓸게 없어지면 중간중간 빠르게 하루의 양을 채울 동시를 하나씩 쓰기도 했어. 동시는 일기장을 금방 채우지만 그렇다고 매일 동시로 채울 수는 없으니 일정한 날짜 간격을 유지하면서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지어 넣기도 했어. 대략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
"오늘은 엄마가 옥수수를 쪄주셨다. 쫀득쫀득한 옥수수가 참 맛있었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데 옥수수 모양을 보니 갑자기 동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는 짧은 행을 여러 연으로 구성하여 쭉~ 써 내려가는 거야.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엄마가 간식으로 주셨던 옥수수, 감자, 수박과 참외 등이 단골 소재였어. 그리고 매미와 잠자리 그리고 냇가에서의 수영이나 겨울철에는 썰매와 눈싸움 등을 동시로 썼던 것 같아.
옛날 성냥갑 모음 : 출처- 이 트레블뉴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 따로 있었어. 엄마가 초등학교 때는 이모들이 급히 숙제를 하는 엄마를 도와서 그림도 그려주고 만들기도 해주곤 했지. 그런데 문제는 이모들은 그때 이미 성인인 데다 유독 손재주가 좋았던 터라 5학년때는 이모들이 만들기를 쓸데없이 잘 만들어 버린 거야.
작은 성냥갑들로 만든 집이었는데, 아직도 그 성냥갑 집이 엄마 기억에 또렷할 만큼 멋졌어. 지금이야 성냥을 케이크 초에 불 붙일 때나 쓰지만 예전에는 성냥을 많이들 썼거든. 성인이었던 이모들은 카페에 갈 때마다 그 카페 이름이 새겨진 다양한 디자인과 색깔의 작은 성냥갑들을 기념으로 가져왔고, 이모들이 세명이나 되었으니 그 성냥갑들이 집에 많이 쌓여있었던 거야.
어찌 되었든 개학 당일 엄마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 성냥갑 집을 가져갔어. 그런데 굉장히 기발하다는 칭찬과 함께 만들기 최우수상을 받아서 방학과제물 전시회에 일기장과 함께 전시가 되는 일이 벌어졌어. 거짓말로 일기를 썼지만 그래도 그건 엄마가 애를 쓴 거라 괜찮았는데, 성냥갑 집이 최우수상을 받아서 전시된 건 부끄러웠어.
그나저나 엄마의 실제 솜씨와 다르게 지나치게 잘 만들어버려서 상을 타버렸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방학 때도 이모들은 엄마의 만들기 숙제를 계속해줄 수밖에 없었지. 갑자기 실력이 형편 없어지면 그 성냥갑 집이 엄마가 직접 한 게 아니라는 것이 들통이 나니까 계속 수준 높은 만들기 과제를 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렸던 엄마는 그런 식으로 방학 숙제를 하는 게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했지. 그리고는 이렇게 또 투덜거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