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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Dec 13. 2023

9편. 순례자의 완장, 조개껍데기

[9편]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짧지만 강렬했던 첫 순례 친구


순례 첫날 저녁 메뉴는 베트남 음식.

프랑스에서 베트남 음식이라니.

갸우뚱할 수 있겠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숙소 바로 앞에 있어서.

체력은 이미 바닥나 더 걸을 수도 없었다.

숙소에서 직접 해먹을 힘은 더더욱.

익숙한 춘권이랑 볶음밥을 골라 숙소로 돌아왔다.


짐정리와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식탁으로 향했는데

 먼저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청년이 보였다.

우와! 드디어 진짜 첫 순례객을 만난 것이다.

20대 초반쯤 됐을까?

청년에게도 우리의 음식을 권하며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이 청년 범상치 않다.

글쎄 전날 야외에서 침낭을 펴고 잤다고 한다.

비박을 했다는 거다.

비가 와서 오늘은 순례자 숙소에서 자기로 한 거고, 내일 숙소도 캠핑장이 될 거라고 했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눈빛에는 패기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젊음이 보기 좋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등불을 보았다. 어렸지만 든든함이 느껴지는 이 친구와

내일 같이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구글맵에 의지해 걸으며 얼마나 불안했던가. 솔직히 기대고 싶었다.

내일 같이 출발할래요? 수줍은 청을 건넸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던 희망의 불씨는

너무 쉽게 꺼져버렸다.

글쎄 이 청년,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단다. 자신의 집인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를 향해.

이런 순례객도 있다고 하더니 진짜 그랬다.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순례길일까. 암~ 그렇담 순례길이 아니지.

     

우리는 자려고 각자의 침대에 침낭을 펴고 누웠다. 소등을 하고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의 침대 쪽이었다.

패기 넘치는 저 청년도 우리처럼 빗속에서 고단한 하루를 견뎌내느라 고생한 건 똑같겠구나.

모두모두 오늘 하루 애썼어요!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기로 해요.

난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싶지만,

모두가 잠든 후 숙소에 세 사람의 웅장한

   콧노래 삼중주가 울려 퍼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St.Gilles Abbey Church 바로 앞 내가 묵은 숙소 입구와 내부                                        

 순례자의 완장, 조개껍데기


조금 전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다.

첫날의 순례가 고단하긴 했나 보다.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아침을 먹고 짐을 꾸리는데

숙소 한켠 진열대 위 조개 껍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조개껍데기는 야고보 사도의 상징이다.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는데,

 이 배가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았고,

조개껍데기들이 시신을 보호하고 있었단다.

스페인 순례길 중간 중간 만난 조가비 이정표 photo by 포도알

그래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는

조개껍데기 모양의 이정표가 많이 눈에 띈다.

또 배낭에 조가비를 달았다면? 필경 순례객이 맞았다. 그렇담 안 살 수가 없었다.

종류는 고를 필요 없이 딱 한 가지였다.

친구와 나는 같은 걸 하나씩 사서

바늘에 실을 꿰어 각자의 배낭에 매달았다.

국가대표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 때 이런 기분일까?

  진짜 순례객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이 더해졌기에

배낭에 몇 그램의 무게가 더해진 것 쯤은

기쁘게 감내할 수 있었다.


 조가비로 내게 와 준 St.Gilles 성인 


조개껍데기에는 Saint Gilles라는 글자와 함께

화살에 찔린 사슴과 사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수도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St.Gilles은 남프랑스의 지명일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성인의 이름이기도 했다. 궁금했다.

     대체 사슴과 수도자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순례 내내 가방에 달고 다니던 조개껍데기 photo by 포도알

이 성인은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왕자로서의 삶과 명성을 피해 남프랑스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은수자로 생활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성인은 한 암사슴과 친하게 지냈는데, 한 번은 이 암사슴이 왕의 사냥꾼들에게 쫓겨 성인의 거처로 들어왔단다. 그런데 사냥꾼들이 암사슴을 겨누어 화살을 쐈는데 실상 부상을 당한 건 성인이었다고 한다. 그 후 성인은 육식이 아닌 채식만으로 생활했고 믿기 어렵지만 이 사슴이 우유를 제공해 마셨단다. 이러한 연유로 이 St.Gilles성인은 ‘거지들, 장애인들 그리고 절름발이의 주보성인’, ‘가축과 목동들의 수호성인’이 되셨다. <박필립 신부 www.scotland88.blog.me 발췌>     


아를에서 생질로 오는 길에

황소와 말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가축들을 보호해준 성인 덕분에 황소와 말의 눈빛이 그렇게 순둥순둥 했는지도 모르겠다.

보호자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품에 폭 안겨 안정감을 느끼는 아가들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보호를 받은 건 가축들만이 아니었다.

눈은 뜨고 있으나 순례길의 이정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눈 뜬 장님인 우리. 

그런 우리에게 장애인의 주보성인인 St.Gilles이 인간 손가락 이정표와 천사를 보내 지켜주셨던 아닐지. Gilles 성인, 배낭에 당신의 조가비 내비게이션을 달았으니, 앞으로도 갈팡질팡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 저의 방향키가 되어주소서.


나중에 스페인에서 만난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조개껍데기도 예뻤지만, 소박하지만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상처 입은 나의 영혼도 어루만져주실 것 같은

Gilles 성인의 조가비가 어쩐지 난 더 좋았다.

스페인에서 만난 조개껍데기 판매대 photo by 포도알


알록달록 조개껍데기 vs. 순례 내내 배낭 위에서 날 지켜준 Saint Gilles의 조개껍데기 photo by 포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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