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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Dec 20. 2023

10편. 틀어지라고 있는 게 계획임을

[10편]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미소 응원

순례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숙소 주인 노부부는 우릴 배웅해 주겠다며 문 밖까지 따라 나오신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가란다. St.Gilles 성당 앞에 우릴 세우고 부부가 번갈아가며 프레임 속으로 들어온다.


 부부의 활짝 피운 미소는 유난히 빛나 보였다.

흐린 하늘에 드리워진 잿빛 구름쯤은 거뜬히 몰아내 버릴 수 있을 것처럼. 아마도 두 분은 깊은 연륜으로 눈치채셨던 것 같다. 다소 경직되어 있던 우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오늘 길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그리고 애써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싶으셨으리라. 전봇대에 붙어 있는 GR653 길

[프랑스 장거리 도보 여행길 Arles-Somport, 산티아고 순례길 아를길과 루트가 겹친다]을 가리키며 저 표식만 따라가면 된다고 안심시켜 주신다. 두 분의       따뜻한 응원에 힘입어 우린 미소를 되찾고 길을 나섰다.    

배웅까지 나와준 St.Gilles 숙소의 두 부부와 GR653(프랑스 장거리 도보 여행로 표식)

 날씨도 내 맘도 흐림


St.Gilles 마을의 건물과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갔다. 그런데 호기롭게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GR653 표식도 안 보인다. 대체 어느 길로 가라는 건지. 다시 미궁 속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요술램프, 구글맵이 다시 소환됐다. 전날만큼 세차진 않았지만 여전히 비도 내리고 날은 계속 흐렸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흐린 건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내 맘도 잔뜩 흐림이었다.

책을 통해 기대했던 순례 모습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게 문제였다.

‘길 안내 표시만 잘 따라가면 된다던데 왜 난 잘 못 찾겠지?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던 순례객들은 다 어디 있을까? 또 식당의 순례자 메뉴가 싸고 맛있다던데..’ 끊임없이 의문이 올라왔지만 정작 답해줄 이는 없었다.


 막힌 하수구를 펑 뚫어줄 시원한 해답을

길은 알고 있을 텐데. 길은 내게 도무지 그 해답을 순순히 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photo by 포도알

 일탈이라는 언니, 아니라는 동생


답답한 생각의 꼬리를 끊어준 건 배고픔이었다.

 어깨도 슬슬 아파 오던 참인데 잘 됐다.

근데 어디서 점심을 먹지?

근처 식당은커녕 상점도 안보였다.

저 멀리 고속도로만 보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순간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속도로 근처에 휴게소나 주유소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

역시 생존본능이 무서웠다.

우린 고속도로 방향 쪽으로 걸어갔고 예감은 적중했다. 눈에 들어온 맥도널드 간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photo by 포도알

오늘의 점심 메뉴는 햄버거와 커피.

배낭을 내려 어깨에 자유를 안겨 주고

한 입 베어 문 버거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근데 동시에 찜찜한 질문이 올라왔다.

 ‘순례객이 이래도 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누구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구글맵을 따라 걸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안먹고 점심시간 친구랑 근처 편의점에서 끼니를 몰래 해결하고 돌아온 기분이랄까?

무릇 순례자란 풀밭 나무 그늘에 걸터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조가비 이정표를 따라 걸어야 할 것 같은데. 살짝 반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다.


순간 찰떡궁합 여동생이 건네는 농담이

음성지원되어 들리는 것 같았다.

‘언니,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그래.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냥 맛있게 먹어. 안 먹을 거면 나 주던가.’

아니, 그럴 순 없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달콤한 점심을 즐겼다. 언니 잡는 귀여운 율리~ 고맙다!        

        

 틀어지라고 있는 게 계획임을


배를 든든히 채우고 걷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제 며칠 후면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우린 순례다운 순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날씨까지 계속 비와 흐림.

나야 앞으로 두 달이란 시간을 더 걸을 수 있지만 친구는 이제 떠나야 한다. 두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 놓고 큰맘 먹고 떠나온 여행인데

고생스러운 기억만 안겨 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계획을 수정했다.

 어차피 파리로 가는 TGV를 타려면 큰 도시로

나가야 했다. 중간 마을을 스킵하고 바로 몽펠리에 Montpellier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친구에게 여행의 즐거움이라도 안겨주고 싶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문연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빵을 사서 버스와 기차를 타고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먼저 숙소를 정해야 했다. 아를 주인장이 줬던 숙소 리스트로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할 수 없이 기차역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마지막 이틀 밤을 보내기로 했다. 몽펠리에는 대학의 도시인만큼 거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파브르 미술관을 둘러봤다.

미술관 밖 뜰에서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며

맥주잔을 부딪치며 오후의 여유를 만끽했다.

몽펠리에의 파브르 미술관 조경과 피로를 달래준 한 잔의 맥주 photo by 포도알

 저녁메뉴를 고르는데 친구가 아까 한국식품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눈여겨봐 뒀단다.

사실 나는 현지음식을 도전하는 걸 즐기는 편이었지만 친구는 조금 힘들어했다.

작은 가게 한 켠에서 비빔밥을 한 입 가득 넣은

친구의 얼굴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친구야! 너 프랑스 온 이후 지금이

제일 행복해 보이는 거 알아?’

아직도 그 충만함 가득했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친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몽펠리에 비빔밥 & 기차역
몽펠리에의 유명한 코메디 광장의 야경 photo by 포도알

 천사는 지금 바로 곁에 있는 그 사람이다


마침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프랑스에 온 이후  드리지 못했던 미사를 몽펠리에 대성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성체를 모시면서 기도했다.

 친구가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기를.

나도 홀로 순례를 잘 이어갈 수 있기를.

미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오르가니스트의

깜짝 연주가 성당을 가득 메웠다.

 지난 며칠간 애썼다는 격려의 울림 같기도,

앞으로 걸어 나갈 길에 대한 축복의 울림 같기도 했다.


 미사 후 페이루 광장으로 향했다. 물의 성과 개선문이 있고 또 몽펠리에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날을 잘 잡았다.

일요일인 관계로 벼룩시장이 열린 것이다.

다양한 골동품을 구경한 뒤 즉석에서 만든 음식을

사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걸터앉았다.

 몽펠리에에 오니 날씨도 왜 이리 쾌청한 지.

어반 스케치(by 김명숙) & 물의 성 photo by 포도알

남는 게 사진이라며 친구에게 연신 포즈를 요청했다. 카메라 속 친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내 눈이 뜨여 알아보게 되었다.

천사는 다름 아닌 몽펠리에까지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친구였음을. 그랬다.

남프랑스 운전 흑역사의 순간 옆좌석에 친구가 없었더라면, 네 번의 숙소에서 친구 없이

혼자 잤더라면, 비 오던 첫날 홀로 길을 잃었다면.

난 진작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신을 보내줄 수 없어 우리 각자에게 엄마를 보내주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순례 왕초보인 나에게 눈에 보이는

수호천사인 친구를 보내주신 게 틀림없었다.

오늘을 빌어 친구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수호천사 친구야! 네 덕분에 몽펠리에까지 갈 수 있었어. 그 때 함께 해줘 정말 고마웠대이~’     


몽펠리에 페이루 광장 & 벼룩시장에서 산 점심 photo by 포도알
천사 친구 & 몽펠리에 대성당 photo by 포도알
몽펠리에 대성당 미사 후 성당에 울려 퍼진 멋진 오르간 연주 recorded by 포도알

Day 2. St. Gilles - Vauvert 21km 완주 (12/04/2018)

Day 3. Vauvert - Villetelle 16.1km 완주 (13/04/2018)

Day 4-5. Villetelle - Montpellier 33km 버스&기차 이동 (14-15/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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