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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Dec 27. 2023

왜 하필 구유여야 했나요

성탄 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되면 각 성당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첫 장소인 구유(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의 모습을 재현하느라 분주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부터 구유를 꾸미고 재현하기 시작한 걸까?

그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꼭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23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로마에서 되돌아가던 길에 이탈리아의 그레치오 동굴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성탄 15일 전에 그 고장에 사는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그레치오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본뜬 구유가 만들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교황청은 올해로 그레치오의 성탄 800주년을 맞아 바티칸의 성탄 구유를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든 그레치오의 구유를 연상시키는 모형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그레치오의 동굴(왼쪽) 2023 바티칸에 구현된 프란치스코 성인의 그레치오 구유 800주년 기념 모형(오른쪽)

그렇다면 예수님은 수많은 장소 중에 하필 구유를 택해 오신 걸까?

올해 나에겐 특별히 이 질문에 대해 깊이 묵상할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도 2023년의 첫 달인 1월과 마지막 달인 12월에.      


올 1월 우리 네 형제자매가 어머니의 칠순을 축하드리기 위해 야심 차게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어머니 마음에 쏘옥 들만한 선물,

바로 이스라엘 성지순례였다.

예상했던 대로 내심 좋아하시는 눈치다.

그런데 혼자는 절대 안 가신다는 어머니.

넷 중 누군가는 동행해야 했다.

둘째는 삼둥이 아빠라 패스.

셋째도 갓 태어난 둘째를 떼어 놓고 갈 수 없는 상황. 넷째는 직장이 가장 바쁜 시기라 휴가를 내기가 힘들단다. 덕분에 딸린 식구 없고

방학이라는 시간이 허락된 내가 당첨됐다.

분명 출발할 때 명분은 어머니의 보호자였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 또한 그분의 감사한 초대였음을 고백한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생생하게 눈에 담고

발로 내디뎌 가슴에 새긴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중 예수님의 탄생지 위에 세워진 주님탄생성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성당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었다.

좁고 낮아 반드시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는 문. 그렇게 예수님은 작음과 겸손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셨다.

더불어 낮은 곳에 있는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물기를 바라셨다.

말뿐인 스승을 따를 제자는 없다는 걸 아시기에,

몸소 한없이 낮고 누추한 구유를 통해 오심으로써.     

이스라엘 베들레헴의 주님탄생성당의 낮고 좁은 출입문 안쪽에서 바라본 문(왼쪽), 바깥쪽에서 바라본 문(오른쪽)

그리고 12월 한 신부님께서 밥이 맛있다며

추천해 주신 여주에 위치한 스승예수제자 수녀회의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일)을 다녀왔다.

그것도 내 생일이 끼어 있던 2박 3일 동안.

피정을 동반해 주신 수녀님의 구유에 대한 강의가 성탄을 앞둔  시기, 귀에 쏙쏙 잘 들어왔다.

밥만 맛있는 게 아니라 영혼의 양식 맛집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마구간은 그저 말과 소 같은 짐승이 머무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존재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여물통에 담긴 돈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양식을 먹고사는.

하지만 그 양식만을 먹고서

우리가 참 행복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던가?

오히려 욕망을 쫓다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

완전한 행복을 맛볼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찾아든 공허함과 마주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그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에

친히 아기 예수님이 오셨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주는

그분의 말씀 양식을 먹길 바라시며.

예수님의 탄생지인 ‘빵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들레헴(Beth집 + lehem빵)이 말해 주듯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영적 충만함 속에 참평화를 느끼게 해 줄 비밀의 열쇠가 여기 있다며.

대전 반석동 성당 제대 앞에 마련된 구유

가만히 눈을 감고 나의 여물통을 들여다본다.

온갖 욕심과 이기심과 미움, 교만, 상처가 뒤범벅된

나의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구유통.

그 구유통에 그분이 오시어

내가 손 잡아 줄 테니 두려워 말라던 용기의 말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던 자비의 말씀,

내 안의 온갖 잘못과 악습에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무한한 용서와 사랑의 말씀을 건네주셨다.

어둠 가득했던 내 영혼의 구유에 빛을 밝혀 주셨다. 그러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것처럼

너도 세상에 그 사랑 나누며 살아가라고.  


Revel 숙소에서 만난 365 매일 말씀책 중 내 생일에 해당되던 불어 문구

산티아고 순례 중 남프랑스의 Revel 마을에서 묵은 Gite(순례자 숙소)에  365일 매일 말씀 모음집이 있었다.

순례 친구들과 각자의 생일에 어떤 글이 적혀있는지 찾아보자고 했다. 그때 내 생일 12월 16일에 적힌 불어 말씀을 숙소 주인장 할아버지가 번역해 주셨다.

 

God continues to want to hear "Yes"

until your death.

신은 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땐 많고 많은 말씀 중에 왜 하필이란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내가 원하지 않는 을 하라고 하심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분은 항상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사랑을 내어주면 내가 더 행복해짐을..

결국 모든 것이 날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생일 피정에 초대해 주신 주님께 답해드렸다.

"네, 주님. 그렇게 당신 사랑 전하며 살아갈게요."

나의 대답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얼굴에

방긋 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그레치오의 성탄 800주년 특집]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든 구유의 기원과 의미

 - https://naver.me/GqNbcgYf

https://youtu.be/oEMEr-Qoz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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