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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Jan 03. 2024

11편. 이별 그리고 절묘한 만남

[11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11화] 이별 그리고 절묘한 만남


 마음도 바깥도 시끄러웠던 밤


친구와의 마지막 밤은 소란했다.

대도시 기차역 주변에 위치한 호텔이어서였을까?

밤새 흥에 취한 사람들의 한껏 들뜬 음성과

쿵쾅대는 비트 때문에 계속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이제 그만 잠 좀 자면 안 될까요.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내 속만 시끄러운 소리 없는 외침이었으니까.

 거기다 이제 실랑이 소리까지 가세했다.

당장 일어나 창문을 열어 소리치고 싶었지만

몸은 왜 마음과 정반대로 움직이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며

최대한 소리를 차단시켜 보는 게 전부다.


그 순간 낮에 길가의 한 상점에 누군가 돌을

던지기라도 한 듯 다 깨진 쇼윈도 유리가  떠올랐다.

프랑스. 생각보다 무서운 나라였나?

아님 대도심의 명암이었을까?

편리함을 제공해 주지만

감수해야 할 세속적인 어둠도 공존하는.

 아를과 생질에서 만난 한없이 정겨운 천사들과

순한 동물들이 갑자기 그리웠다.

암튼 내일 아침 기차역으로 가려면

 시끄럽고 심란한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친구를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절대로.      


 홀로 서기


동이 튼 지 얼마 안 된 이른 아침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어젯밤 소리로만 듣던 시끄럽던 그 길을

제발 잘 통과하기를 바라면서.

그래! 쫄지말자! 앞만 보고 가는 거야!

 긴장감을 들키지 않게 당당하게 앞만 보며

 걸어가는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릴 향해

큰 소리로 뭐라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럴 땐 프랑스어라고는 ‘봉쥬르, 맥시’

밖에 모르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난 아무것도 모르쇠’ 주문을 외며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바짝 쪼그라든 감정을 티 내고 싶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빨라지는 걸음은 어쩔 수 없었다.


 휴우.. 무사히 기차역에 도착했다.

 역내 카페에서 까눌레와 커피로 허기달래

드디어 친구와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친구의 파리드골공항까지의 여정을,

친구는 나의 앞으로의 순례 여정을 걱정했다.

떠나면서 친구는 내게 당부했다.

"친구야, 무리하지 말고 안되면 그냥 돌아와. ?"

"응, 알았어. 너도 공항까지 잘 가고 도착하면 문자 줘."    


이제 진정한 홀로서기다. 

친구에게 일단 혼자 걸어 나가 보고

도저히 안되면 나도 뒤따라 귀국하겠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순례다운 순례도 못해보고 그냥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떠나온 길인데.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혼자 길을 당당히 헤쳐나갈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물스물 다시 두려움이 밀려들려는 찰나 

초심이 떠올랐다.

"일단, 해보는 데 까지 해 보자!"

스탬프를 찍은 Grabels 성당 & 마을에 핀 꽃(보라색 꽃을 좋아하시던 고등학교 담임샘을 떠오르게 했던)

 절묘한 타이밍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구글맵에 의지해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몽펠리에 도심을 벗어나

Grabels라는 마을에 당도했다.

성당에서 스탬프 인장을 찍고 마을을 둘러본 뒤

한적한 산길로 들어섰는데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구글맵이 먹통이다. 큰 일 났다.

 여긴 IT 강국 한국이 아니었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과 오른쪽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아무리 길을 노려봐도

한참을 저울질해도 모르겠다.

방법이 없었다.

그냥 감을 믿고 가보는 수밖에.

그래! 왠지 왼쪽이 끌리는데? 오키! 일단 고고!

갈림길 오른쪽 & 갈림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

그러나 가면서도 확신이 없으니 연신 뒤를 돌아보며

느릿느릿 자신 없는 걸음을 간신히 떼고 있었다.

 그렇게 한 50걸음쯤 갔을까?

오른쪽 길에 배낭을 멘 두 남녀가 보이는  아닌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분들 순례객이다!! 심봤다!

그리고 저분들을 절대 놓쳐선 안된다.

 나는 방향을 바꿔 필사적으로 뛰었다.

무거운 배낭이 들썩이며 어깨를 짓눌렀지만

뒤뚱뒤뚱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질주했다.

그때 다시금 확인한 한 가지.

학창 시절 시험 볼 때도 느꼈지만

난 찍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늦은 순례학교 O.T.


뼛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반가움이 담긴

상큼한 인사가 절로 나왔다.

하~~~이! 

몸을 돌려 넉넉한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시는 중년의 캐나다 부부.

 구글맵에 의지하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이라

넘 반가웠다고 하니 남자분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신다.

'왠 구글맵? 이 사람 길안내 표식도 읽을 줄 모르는 군.'

눈치 백단 캐나다 아저씨는

금세 왕초보인 나를 알아보셨다.

 그리고 바로 수준에 맞는 티칭에 들어가신다.

걷다가 길 안내 기호가 나오면

스틱 끝으로 기호를 가리켜 콕 짚어 주셨다.

프랑스 국기에 나오는 흰색과 빨강색의

 두 줄 표식은 주로 돌이나 나무 기둥 위에 새겨져 있었다. 어쩐지.... 스페인 순례길에서는 조개모양 화살표로 길바닥, 벽, 이정표 등 빈번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안내해 줘서 절대 길 잃을 염려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워낙 순례객이 많다 보니 순례객 뒤꽁무니만 잘 쫓아가면 다고도 했다.    

순례 학교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 고마운 선생님

그런데 남프랑스 아를길은 길 안내법이 전혀 달랐는데 어디서도 난 그걸 배우지 못했다.

다들 설마 그걸 모를까..

당연히 알겠거니 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내 눈엔 안내 표식이 잘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테고.


'두 줄은 직진, 아래가 기억자로 된 건 왼쪽으로 가고, 뒤집힌 기억자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표시랍니다."

 기호가 나올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시고는,

돌연 테스트에 들어가신다.

 길안내 기호가 나오니 본인은 멈추고

날더러 혼자 길을 가보라고 하신다.

 엄지척!

나는 운 좋게도 수준에 맞는 티칭이

가능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

자칫 잠시 딴 생각하다 지나치기 십상인 프랑스의 길 안내 표식

 되찾은 자유

순례길 위에서 난 그렇게 걸음마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는 학생이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세상이 씌워 놓은,

어쩌면 나 스스로 씌워 놓은 교사의 모습.

바르고 책임감 있으며 모범적이어야 할 것 같은 ‘선생’이라는 무게. 뭐든 다 알아야 할 것 같고,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는 솔직한 감정도

내비춰선 안될 것 같은 암묵적 기대.


하지만 이곳 순례길에서 나를 선생으로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게를 잠시 벗어던지고,

아직 세상물정 모르기에

뭘 해도 너그럽게 이해받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

내게 절실히 필요했고

나의 내면도 깊이 그리워하고 있던 그것.

바로 자유.

그래! 난 자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자유의 옷을 입은 내 목소리는 하이톤이 되었고, 발걸음은 아이처럼 폴짝 가벼워졌다.


이제야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분께서 순례길로 초대하신

깊은 뜻 중 하나가 아닌가 싶었다.


Day 6: Montpellier - Montarnaud 16km 완주 (16/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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