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탬프를 찍은 Grabels 성당 & 마을에 핀 꽃(보라색 꽃을 좋아하시던 고등학교 담임샘을 떠오르게 했던)
절묘한 타이밍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구글맵에 의지해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몽펠리에 도심을 벗어나
Grabels라는 마을에 당도했다.
성당에서 스탬프 인장을 찍고 마을을 둘러본 뒤
한적한 산길로 들어섰는데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구글맵이 먹통이다.큰 일 났다.
여긴 IT 강국 한국이 아니었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과 오른쪽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아무리 길을 노려봐도
한참을 저울질해도 모르겠다.
방법이 없었다.
그냥 감을 믿고 가보는 수밖에.
그래! 왠지 왼쪽이 끌리는데? 오키! 일단 고고!
갈림길 오른쪽 & 갈림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
그러나 가면서도 확신이 없으니 연신 뒤를 돌아보며
느릿느릿 자신 없는 걸음을 간신히 떼고 있었다.
그렇게 한 50걸음쯤 갔을까?
오른쪽 길에배낭을 멘 두 남녀가 보이는게아닌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분들 순례객이다!! 심봤다!
그리고 저분들을 절대 놓쳐선 안된다.
나는 방향을 바꿔 필사적으로 뛰었다.
무거운 배낭이 들썩이며 어깨를 짓눌렀지만
뒤뚱뒤뚱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질주했다.
그때 다시금 확인한 한 가지.
학창 시절 시험 볼 때도 느꼈지만
난 찍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늦은 순례학교 O.T.
뼛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반가움이 담긴
상큼한 인사가 절로 나왔다.
하~~~이!
몸을 돌려 넉넉한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시는 중년의 캐나다 부부.
구글맵에 의지하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이라
넘 반가웠다고 하니 남자분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신다.
'왠 구글맵? 이 사람 길안내 표식도 읽을 줄 모르는 군.'
눈치 백단 캐나다 아저씨는
금세 왕초보인 나를 알아보셨다.
그리고 바로 수준에 맞는 티칭에 들어가신다.
걷다가 길 안내 기호가 나오면
스틱 끝으로 기호를 가리켜 콕 짚어 주셨다.
프랑스 국기에 나오는 흰색과 빨강색의
두 줄 표식은 주로 돌이나 나무 기둥 위에 새겨져 있었다. 어쩐지.... 스페인 순례길에서는 조개모양 화살표로 길바닥, 벽, 이정표 등 빈번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안내해 줘서 절대 길 잃을 염려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워낙 순례객이 많다 보니 순례객 뒤꽁무니만 잘 쫓아가면된다고도 했다.
순례 학교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 고마운 선생님
그런데 남프랑스 아를길은 길 안내법이 전혀 달랐는데 어디서도 난 그걸 배우지 못했다.
다들 설마 그걸 모를까..
당연히 알겠거니 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법이니
내 눈엔 안내 표식이 잘 눈에 띄지도 않았을테고.
'두 줄은 직진, 아래가 기억자로 된 건 왼쪽으로 가고, 뒤집힌 기억자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표시랍니다."
기호가 나올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시고는,
돌연테스트에 들어가신다.
길안내 기호가 나오니 본인은 멈추고
날더러 혼자 길을 가보라고 하신다.
엄지척!
나는 운 좋게도 수준에 맞는 티칭이
가능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
자칫 잠시 딴 생각하다 지나치기 십상인 프랑스의 길 안내 표식
되찾은 자유
순례길 위에서 난 그렇게 걸음마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는 학생이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세상이 씌워 놓은,
어쩌면 나 스스로 씌워 놓은 교사의 모습.
바르고 책임감 있으며 모범적이어야 할 것 같은 ‘선생’이라는 무게. 뭐든 다 알아야 할 것 같고,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는 솔직한 감정도
내비춰선 안될 것 같은 암묵적 기대.
하지만 이곳 순례길에서 나를 선생으로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무게를 잠시 벗어던지고,
아직 세상물정 모르기에
뭘 해도 너그럽게 이해받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
내게 절실히 필요했고
나의 내면도 깊이 그리워하고 있던 그것.
바로 자유.
그래! 난 자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자유의 옷을 입은 내 목소리는 하이톤이 되었고, 발걸음은 아이처럼 폴짝 가벼워졌다.
이제야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분께서 순례길로 초대하신
깊은 뜻 중 하나가아닌가 싶었다.
Day 6: Montpellier - Montarnaud 16km 완주 (16/04/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