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편. 어디로 떠날까? 그래! 거기!

[3편]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by 포도알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3편]


이왕이면 멀리, 되도록 길게


어디로 떠나지?

일단 떠나기로 마음먹고 나니

몽글몽글 설렘이 올라왔다.

기다리며 준비하는 소풍 전날 밤 두근대는 마음처럼.


어디로 떠나든 이왕이면 멀리,

되도록 길게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면 적어도 그 녀석이 불쑥

내 앞에 다시 나타나 놀라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또 누가 어디 숨어있지는 않나

가다가도 한 번씩 뒤를 돌아봐야 하는

번거로움도 줄어들 테지.


지금 내겐 살아온 익숙한 동네보다

처음 가는 낯선 여행지가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또 내겐 감사하게도 1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게 한참 여행지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날따라

방 안 책장에 꽂힌 낯선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까미노 데 포토그래퍼? 집에 이런 책이 있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이 오래전에 선물 받아

읽고 꽂아둔 책이었다. 어쩐지.. 낯설었다.

5년 넘게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지만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책이 유난히 반짝인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자기 얘길 들려주고 싶다는 듯.


집어든 책은 단숨에 읽혔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내게 여행책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작가는 프랑스의 생장드포드에서부터 출발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40일의 도보 순례 경험을 나누고 있었다.


WHY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체 어떤 곳이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걸까? 알고 싶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 성인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San Diego합쳐진 말이었다.


야고보는 다양한 언어권에서 달리 불렸다.

라틴어, 독일어: 야코부스

영어: 제임스

프랑스어: 자크

에스파냐어(스페인어): 디에고


언어를 가르치다 보니 이런 궁금증도 일었다.

영어로는 제임스인데

왜 우리말로 번역했을 땐 야고보지?

사연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설이 다양하다.

그래서 바로 이해되는 선까지만 받아들이기로 다.

영어보단 독일어 번역이 유력해 보이고

Julia가 우리말로는 율리아지만, 영어로는 줄리아로 발음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정도까지만.

길에서 만난 이정표들 : 프랑스(Saint Jacques), 스페인(Saint James), 스페인(Camino de Santiago)

콤포스텔라는

별(Stellae)이 떠 있는 들판(Campus)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따르면 기원 후 44년경

순교한 야고보의 유해가 조가비에 싸여 해안가로

떠내려 왔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810년경 은둔자 펠라지우스가

꿈에서 계시를 받고 테오도미르 주교와

들판 위 반짝이는 신비로운 별의 인도를 받아

그의 무덤을 찾게 된 것에서 유래되었단다.


이후 그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많은 사람들의 순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를 가슴에 품은

전 세계 도보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모여드는 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그런 길이었다.



모든 나침반이 가리키고 있던 방향


책을 읽다 문득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더니 이내 생생하게 소환됐다.

2016년 이냐시오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갔던

스페인 성지순례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저기.. 저 사람들 보이시죠? 저희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버스로 이동하고 있지만

저렇게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도보 순례객도 있답니다.’


설명이 끝나고 곧바로 보여주셨던 영화.

'The Way'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던

잔잔한 울림이 좋았었다.



어느 날 노년의 안과의사인 주인공이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들이 갑자기 모든 것을 접고 순례길을 떠났는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스페인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을 대신해서 그 길을 걷기로 한다.

길 위 순례자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즐거움을 더해 주던 영화.


그러면서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나로서

‘산티아고 도보 순례’를 버킷 리스트에

콕 새겨두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거기다 1년간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순례자를 위한 숙박비가 저렴하다는 점(어떤 곳은 donation으로 내고 싶은 만큼만 내기도 한다),

걷고 싶은 만큼 오래 걸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쏘옥 들었다.

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자,

영어교사로서 교과서 영어가 아닌

산 영어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굿!


어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매력이 차고도 넘쳤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신 길이니

순례 여행을 떠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땅! 땅! 땅! 그래! 산티아고!’

마음은 벌써 산티아고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다? No! 결심이 반이다!!


그런데 가던 걸음을 멈칫하게 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하루 몇 시간씩 것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본 적은 없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체력과 건강이 버텨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저질러도 되는 일인지 더 알아보기 위해 까미노 준비하는 사람은 다 가입한다는 카페 ‘까미노’에도 가입하고, 관련 서적도 여섯 권이나 주문해 읽었다. 다양한 루트나 숙소에 대한 정보는 전보다 쌓였지만,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얻지 못했다.


그랬다! 그건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일단 떠나보고,

까짓 거 아니다 싶음 돌아오면 되지 뭐!


아직 떠나기 전인데,

벌써부터 꽤 겁이 없어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분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결심한 순간,

그분은 이미 나를 새롭게 빚고 계셨다.



참고서적 :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장 이브 그레그와르)

keyword
작가의 이전글2편. 내면의 위기탈출 No.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