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내면의 위기탈출 No. 1

[2편]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by 포도알

내면의 위기탈출 No.1


이성의 무력함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아이 선에서 일이 마무리되지 않자 상담선생님은 학생의 어머니와 통화를 시도하셨다.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자식이 밤마다

나가 그런 일을 벌이고 다니는 줄 몰랐다고

선생님께 너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단다.

이미 졸업도 했겠다, 경찰에 고소할 수 있었지만

그냥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신 다짐을 받았다.

다시 한번 나에게 연락을 하거나,

근처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이전 사건까지

다 한꺼번에 책임을 물을 거라고.

그리고 상담선생님께서 어머니께 강력히 권고하셨다.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TV에 나오는 묻지 마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꼭 치료를 시작하시라고.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내 마음은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모르게 뒤엉켜 있었다. TV를 보다가도 이유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놀람, 억울함과 후회, 그간 갖고 있던 교직관의 혼란.

그 모든 것이 뒤엉킨 눈물이었으리라.


논리와 이성을 사용해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남는 것은 의문뿐이었다.


'그러니까... 왜... 왜 나에게... '




침묵과 잠심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

한 동안 나는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없었다.

내면 깊은 곳으로 또아리를 틀고

점점 깊이 숨어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나올지 모르겠지만 노크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어느 날, 안심하고 나올 수 있도록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간대에 텅 빈 성당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성당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홀로 성당을 지키고 계신 십자가의 예수님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주님, 아무 잘못도 없으신데 왜 거기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나요?’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아끼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의 배신으로 돌아가셨지. 제자의 배신!

순간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물론 신과 나를 동일 선상에 두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리고는 여쭈었다.


‘주님, 주님은 억울하지 않으셨어요?’


이런저런 질문이 올라오자,

앉아서 본격적으로 그 분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졌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내 얘기를 듣고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진짜 속내를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제자의 배신을 몸소 겪어내신 예수님이라면

분명 내 억울함을 백 번 이해해 주실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머릿속 떠오르는 생각들을 한참 흘려보내고 나니 어느 순간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때 그분을 요즘 나의 일상 속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간 꾹꾹 눌러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냈다.


“주님,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이가 화내야 할 대상은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

아픈 자신의 치료에 무관심한 어머니,

자신을 무시한 친구들 아닌가요?

왜 저였나요?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요?”


안 그래도 상처 입은 나를 다독이기보다는,

스스로 또 한 번 생채기를 내고 있다.

방 한 귀퉁이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웅크린 채 울고만 있는 내게, 주님은 두 손을 내밀며 말씀하신다.


“나랑 여기서 나가자.”


“나간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난 여전히 슬픔과 절망에 갇혀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다시 나오기가 두려웠다.

나갔다가 다시 아픈 상황과 마주할까 봐.


사실 그보다 정말 외면하고 싶은 따로 있었다.

그분 손을 잡아 드리면 왠지 하실 것 같은 말씀.


'이제 그만 용서해 주자.'


'하지만 주님, 그럼 갈기갈기 찢긴 제 마음은요?

죄송하지만 제 안엔 누군가에게 내어줄

온기 있는 어떤 것이 남아있지 않아요.'


아직 하시지도 않은 말씀을 맘대로 예단하고

홀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나.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그분께서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신다.


“조금만 용기를 내어 내 손을 잡아보지 않겠니?”


여전히 의심 가득이었지만

손을 거두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못해 잡아 드렸다.


그러자 내 두 손을 이끌어 창 밖으로 나가시더니

이내 하늘로 향하신다.

우리는 함께 하늘을 날았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세차게 두 볼을 때리는 바람도 상쾌했다.

세찬 바람이 조금 전 흘리던 눈물을 어디론가

다 가져가버린 걸까?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말갛고 뽀송뽀송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 구석구석

너에게 다 보여주고 싶구나.”


그리고 나지막이 그러나 분명히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

“떠나라.”는 마지막 말씀의 여운은

한 동안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1년간 휴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교직 생활 중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1년간의 무급 자율연수휴직.

많은 분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 아이들과의 소통이 너무 어려울 때, 그러니까 버틸 대로 버티다 더는 버틸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리라 아껴두는 그 카드.


하지만 내겐 그때까지 기다릴 힘이 없었다.

내 안의 힘든 감정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교단에 설 자신이 없었다.

교직이 천직이라 여기며 12년 넘게 매너리즘이란 게 뭔지도 모를 만큼 즐겁게 일하던 나였지만,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그래, 잠시 다 내려놓자. 떠나자.


그분은 그렇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나를 움직이셨다.



[작가의 노파심]


* 위 글은 <이냐시오 묵상기도법>에 따른 개인적인 기도체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주님'이란 단어가 불편하신 분들은 자신이 믿는 신이나 내면의 목소리로 생각하고 읽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