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양귀자 소설 [모순]을 좋아한다. 소설로 입문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입문을 도와준 책이랄까.
어느 여름 청계천 계단에 앉아 그 책의 절반을 읽어냈다.
지금도 책을 잘 읽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모순을 먼저 추천한다.
누구나 도파민 터지는 책이라 하면 궁금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양귀자 작가님의 소설이 하나씩 궁금해졌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 많으니까 오히려 읽을 엄두를 못냈다가
이번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이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소설 속 강민주는 내 어린 시절 날카로운 사고방식을 투영하고 있었다.
자의식이 강하고 낭비는 딱 질색이던 다소 차가운 내면을 가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녀도 자신의 그것이 깨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필시 그러했다.
강민주는 그녀가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된 ‘납치극’의 인질에게 마음이 동요 되었으니,
그리하여 연극에 까지 동참할 정도로..그 끝엔 죽음을 맞이 할지라도.
강민주가 탑스타 백승하를 납치 하기로 한 이유는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남편이 행하는 수많은 욕설과 폭력, 무자비한 행위들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 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전화 상담을 통해 하소연하는 것에 그치는 경험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승하같은 완벽한 남자를 보며 또다시 희망을 품는 그 어리석음을 해하고자 함이었다.
백승하 역시 그녀들 옆에 있는 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강민주의 생각과 달리 백승하는 그런 남자들은 아니었다.
추문이나 그 어떤 흠결도 없는 이 남자는 그저 영화를 사랑하는 배우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납치범인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었다. 강민주는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누군가를 만난 셈이다.
그렇게 마음을 열다보니 무리한 행동도 감행했다. 그의 아들을 데려오는것, 그와 함께 연극을 하는 것 등..
<문장 스크랩>
p.9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중략) _강민주의 노트에서
p.70
그녀들에게는 가을도 없다. 그녀들의 계절에는 색깔이 없다. 색깔 없는 세월을 살아온 한 여자가 전화선 저쪽에서 이렇게 묻는다. (중략)
p.91
시계의 초침 소리가 빈 집을 크게 울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꾸 시계에 눈이 간다. 그러나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이만한 긴장마저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무리다.
→ 지금의 시각에서 이러한 지점은 강민주를 나르시스트로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이 1992년도에 나온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민주의 이런 성격은 귀한 것이다.
p.155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 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중략) _강민주의 노트에서
p.210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번의 공연. (중략) _강민주의 노트에서
p.336
희극은 어둡고 음울하게, 그리고 비극은 밝고 산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