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교육 10번째 이야기 )
학교에서 오랜 시간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이 있었다.
탄핵, 핵 보유, 종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
교사들은 정치적인 중립성과 교육자의 책임이라는 미명 아래, 무언의 규범인 듯 민감한 내용들은 피해 왔다. 학교로 논란이 전파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또 입시 중심의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하거나 토론하는 환경을 만들지 못했고. 정치나 사회적 논쟁 자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꺼리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다루지 못했던 주제들이 과연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현실 감각과 사고력의 성장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학생들은 다양한 현실 문제를 직면하고 다름을 존중하며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지식을 넘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학교 교육은 살아갈 현실을 마주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 Consensus)’란?
1970년대 독일은 동서독 분단이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극도의 이념 대립을 겪었고, 이는 학교 교육에서도 혼란과 갈등이 그대로 전해졌다. 최근 우리나라가 직면한 상황과도 닮아있는 모습이다. 정치적 이념 갈등이 12년 동안 최고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당시 독일의 모습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은 이러한 이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76년 독일의 작은 도시 보이텔스바흐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의 정치교육 전문가들이 모여 오랜 토론 끝에 정치교육의 기본 원칙을 담은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이끌어냈다. 공식적인 법규는 아니었지만, 독일 정치교육의 헌법처럼 자리매김했고, 수십 년간 동서독의 체제 갈등의 분열에 화합을 이끌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주요 내용인 3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사는 개인의 정치적 가치관이나 특정 이념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첨예한 이슈일수록 다양한 관점과 논점을 충분히 제공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입장을 설정하도록 돕는다. 셋째,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이 배운 것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현실과 연계하며, 학생들이 처한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 합의는 20년 이상의 심도 있는 토론과 연구를 통해 현장 교사들에게도 폭넓게 인정받았다. 보이텔스바흐 원칙을 통해 학생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경기교육은 이러한 원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학생들이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토론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극단적인 이념 갈등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우리 교육 현장과 사회 전체의 균형과 공존의 문화를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경기교육, 공존을 위한 새로운 토론
경기교육은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원칙으로 경기교육만의 토론 시스템을 구축했다.
기존 토론 방식은 서로 치열하게 맞서며 결국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가른다. 어느 때는 판정단도 있어서 판정단이 결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경기교육의 토론은 승패가 없다. 처음부터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을 목표로 한다. 자신의 입장을 치열하게 주장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반박하지만 마지막은 공존을 향한 주장하기라는 단계를 거쳐 상호 이해와 합의를 이끌어낸다.
때로는 100%의 합의가 불가능할 수 있다. 경기교육은 100% 합의하지 않는다.
공존을 향한 주장에 합의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혹은 50%만, 혹은 30%만 합의될 수 있다.
‘다름과 공존하기’에서는 서로 완벽하게 합의하지 못했더라도 토론에서 논의된 주제를 사회참여 활동과 연결해 마무리한다. 예를 들어 정책 제안이나 사회 참여 활동을 진행할 때, 자신과 다른 입장에 관해서도 토론 과정에서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반대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를 반영한 더 균형 있는 정책이나 실천 방안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기교육은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고 공존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된다.
: 경기교육의 새로운 토론 시스템의 특별함.
경기교육의 토론 수업은 국어나 영어, 사회와 같은 수업뿐 아니라 수학 수업에서도 적용된다. 수학에서의 토론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제목은 ‘수학으로 풀어보는 세계 불평등’
수업은 <탐구 질문>으로 시작된다.
- 공적개발원조(ODA)란 무엇인가? (용어 정리)
- 국가 내, 국가 간의 소득 불평등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 공적개발원조(ODA)로 인한 국가 내, 국가 간 소득 불평등을 분석하기 위한 통계 지표는 무엇이 있는가?
- 지니계수, 국내총생산(GDP) 등 통계 지표의 계산원 리가 뭘까?
- 2차 통계 자료란 무엇인가?
-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공적개발원조(ODA)는 어떤 변화와 노력이 필요할까?
- 2차 통계자료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에 이어 논쟁적 질문이 시작된다.
탐구 질문이 끝나면 <논쟁적 질문>이 이어진다.
-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공적개발원조(ODA)를 확대해야 하는가?
수업 이후 <과제>는 다음과 같다.
- 국가별 통계 지표를 조사하고 소득 불평등과 국민의 소득 변화를 비교 분석하기
- 통계적 분석 자료를 포함한 입론서 작성하기가 된다.
학생들은 보통 수학을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수업을 듣는다면 수학의 쓸모에 대해 더 크게 생각하고 확장된 사고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학생들은 정답만 찾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통해 수학적 탐구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경기교육의 토론 주제는 다양하다.
학교 내 휴대폰 사용 자유화, 학생의 권리일까 학습 방해일까?
학생들의 정치적 표현과 집회 참여는 당연한 권리인가, 아니면 학습권 침해인가?
학교폭력 가해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게 범죄 예방일까, 인권 침해일까?
인공지능(AI)의 발달, 과연 우리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학생 평가에 교사의 주관적 판단을 넣는 것은 공정한가, 불공정한가?
현장의 교사들은 “기존의 논쟁 중심 토론은 서로가 이기고 지는 데 집중하다 보니, 승패가 결정된 후에는 오히려 상처와 갈등이 더 깊어지기도 했다”며, “경기형 토론교육은 처음부터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듣고 공존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훨씬 의미 있다”라고 전했다.
학교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고 한다. 서로 대립하던 학생들이 수업에서 열린 토론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참여한 학생은 “관심 있는 이슈를 다양한 관점을 접하다 보니 오히려 내 생각이 더 깊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토론 문화가 정착되면서 학교는 갈등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존중이 커가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 경기교육, 토론 교육 주도적으로 추진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나는 토론 교육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2024년 6월, 서울특별시교육청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미래세대 열린 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기관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공동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서울교육청 조희연 교육감에 이어 정근식 교육감과도 협의하고 경기도 학생들과 서울시 학생들의 토론을 구체화하였다. 최종 합의된 토론회는 2025년 8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토론의 주제는 남북문제, 한일 관계 등 첨예하게 대립 중인 이슈에 대해 논의되었지만 최종 "대학수학능력시험 제도를 폐지해야 하는가?"로 잠정 결정되었다. 토론 방식은 경기와 서울의 고등학생들이 팀 간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토론회는 학생들이 직접 논쟁적이고 첨예한 이슈를 주제로 열린 토론에 참여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이다. 나는 이 토론회가 균형 잡힌 사고와 상호 존중의 태도를 기르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토론회를 통해 우리 교육이 만들어낸 변화의 가시적이고 생생한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교육의 미래, 균형 있는 사회를 향해
경기교육의 토론 교육은 학생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우리 사회 전체가 갈등을 넘어 성숙한 소통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될 것임은 확신한다.
토론은 학생들에게 "내 의견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 하고 강제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을 굳게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네" 하는 마음을 갖도록 돕는다.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진짜 균형 잡힌 교육이 가능하다.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과 화합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경기교육은 ‘지금 우리가 만드는 교육은 어떤 미래를 열어줄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 다양한 가치와 생각이 공존하며 발전하는 그런 미래를 위해 이제 교육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경기교육은 모든 출발 선상을 새롭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