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교육 4번째 이야기)
며칠 전 쓴 “자율”에 대한 글을 읽은 친구가 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오래전(2010년경)에 자신이 써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었다.
내용은 1982년 봄 공군 장교 훈련 시절 우리가 함께 겪은 에피소드였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스스로 책임지고 행동하는 자율이 얼마나 큰 힘인지 보여주는 글로, ‘자네가 쓴 글과 일맥상통한다’며 읽기를 권했다.
특별한 기억을 다시 떠올려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널리 공유하고픈 마음에 보내온 글을 그대로 올린다.
○ 글쓴이: 공군사관후보생77기 동기. 전, 부산대 공공정책학부 이상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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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임태희를 소개합니다.
: 양해를 구하고 달리는 후보생
-아직도 산야에는 잔설(殘雪)이 남아있는 1982년 3월 16일 대전 공군교육사령부 연병장-
100대 1을 넘는 제77기 공군장교 후보생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마지막 관문인 체력장 테스트를 기다리고 있는 전국에서 모인 수재(?)* 들은 초조하게 ‘오래달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내 완주해야 하는 4Km(연병장 5바퀴 반) 구보는 공부만 하다가 온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 왔습니다.
순서가 된 저는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작위로 구성된 10명과 함께 그냥 무작정 달렸습니다. 그 때 제일 뒤에서 뛰던 듬직한 사나이가 제일 앞으로 내달리며 “이렇게 달리면 힘듭니다. 제가 보조를 맞출 테니 같이 뛰어봅시다”라고 하면서 “하낫, 둘--”하면서 구령을 붙이더군요.
맹목적으로 그것도 경쟁적으로 달리던 우리는 연병장 다섯 바퀴를 이렇게 보조를 맞추어 뛰었습니다. 혼자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열심히만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습니다. 반 바퀴를 남겨두고 그 사나이는 “이제 모두 자기 기량 것 뛰어봅시다. 제가 앞서 뛰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앞으로 내달아 가더군요. 그 사나이의 마지막 스퍼트는 놀라왔습니다. 그 사나이는 후보생 전체에서 1등의 기록으로 주파하였고, 그 그룹의 후보생들도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그 사나이가 바로 큰바위 임태희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같은 남자로서 1차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스테미너에 놀랐고 그 보다도 그런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할 줄 알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준 그 태도에 더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같이 뛴 우리 후보생들이 주도가 되어 우리는 그를 공군사관후보생 77기 ‘명예위원장’에 추대하였습니다.
: 죽도록 맞고 항복한 후보생과 끝까지 버틴 명예위원장
- 임관을 1달여 앞둔 어느 날 오후-
후보생 훈련생활에서 들어가고 나가는 날은 알겠습니다만 매일 매일의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우리는 훈련의 일환으로 소위 PT체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대장**은 자세가 불량한 후보생들을 손으로 가슴을 치거나 발로 걷어찼습니다. 걷어차인 후보생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뒤에서 걷어차이고도 바로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구대장께서는 그런 저의 행동을 도전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저는 자존심이고 뭣이고 다 던져버리고 급기야 “살려주세요.”라고 했고, 보다 못한 옆에 있던 구대장과 후보생들이 말렸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저는 내무반이 아니고 구대장실에 격리되어 누워 있었습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구대장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시절 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종의 후보생 ‘데모(농성)’가 일어난 것입니다.
임태희 명예위원장이 호출되어 내가 누워 있는 구대장실로 들어왔습니다.
선임구대장은 “명예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후보생들을 해산시켜야 한다.”라고 명령했고, 명예위원장은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없이는 어렵다”는 요지의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명예위원장은 아무런 죄 없이 엄청 당하고 선임구대장의 ‘엎드려뻗쳐’라는 지시에 저녁 8시부터 밤 1시까지 무려 다섯 시간을 그 자세로 있었습니다. 급기야 교육대대장(공군중령)의 중재로 후보생들은 한 시에 내무반에 들어 왔고 이튿날 전후보생들은 아침 식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명예위원장의 맷집과 인내심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보통 그 자세로 한 시간도 버티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되는 일에는 자기희생으로 방어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누워 있던 제가 미안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약 그 때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덕분에 무사히 임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구가 아니고 경남 사천 비행장의 정훈장교로 임관하였습니다.
그 당시 공군본부에 있던 처가 쪽에 가까운 어른에게 대구로 이동을 부탁했습니다.
전근은 되었지만 훗날 장모님에게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서방은 임관 순위가 꼴찌이고, 게다가 ‘군생활 부적응 가능성이 있음’이라는 꼬리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 처가 쪽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청탁성 부탁은 하지 않았습니다.
: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임태희의 역량
-어려운 요즈음에 생각나는 사람-
우리나라의 현실은 시기적으로 매우 어렵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북핵과 관련된 대북문제와 백약이 무효인 청년실업 문제 등 난제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지금은 상대방을 헐뜯기 위한 모함과 음해가 난무합니다.
이런 시기에 누구인들 이 많은 난제들을 cure-all 할 수 있는 장사(壯士)가 있겠습니까마는, 현정치권에서 임태희 실장님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만난 이후 제가 관찰한 그는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건강한 사람과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함께 win-win 하는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임태희 실장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부산대 경제통상대학 공공정책학부 교수 혜철 이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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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공군사관후보생 선배후배님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저희 동기들을 수재라고 하는 증거(evidence)는 다음과 같습니다. 1982년에 임관한 저희 77기들은 처음으로 복무기간이 5년에서 3년으로 단축되었고 임관인원이 워낙 적어 저희들끼리는 서로가 “내가 어떻게 시험을 통과하였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고 저 개인적으로도 단기 KATUSA, 육군 특임정훈장교 등을 모두 합격하고 공군장교에 응시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공군모병관으로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 봤습니다. 사실 저는 무엇보다 저의 고향인 대구에 공군기지가 있었고 공군은 전통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기에 그 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려면 더욱 공군 장교 임관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구대장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태권도 유단자이었던 그 구대장께서는 누구보다도 사관후보생 훈육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시절 군대 훈련 분위기가 그랬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