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없는 목적지가 있을 수 있는가?
브루탈리즘(Brutalism)은 20세기 중반 등장한 건축 양식으로, 거칠고 노출된 콘크리트, 기능성을 강조한 단순한 형태, 그리고 장식을 배제한 구조적 솔직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은 전후 도시 재건과 사회적 평등을 위한 공공 건축물에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과 자본의 도구로 변질되기도 했다. 브루탈리즘은 단순한 미학적 표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이념과 충돌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건축 스타일이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한 건축가의 삶을 통해 예술과 자본, 이상과 현실, 그리고 권력과 생존이 충돌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미국에서 자신의 건축적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점차 소외된다. 그의 건축은 기능성과 공공성을 강조한 브루탈리즘의 철학을 따르지만, 후원자인 해리슨은 이를 개인적인 소유와 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브루탈리즘이 원래는 사회적 평등을 위한 건축이었으나 결국 국가 권력과 자본의 도구로 변질된 것처럼, 라즐로의 예술도 점차 그의 의도를 벗어나 타인의 필요에 의해 소비된다.
이 영화에서 브루탈리즘 건축은 라즐로의 삶을 반영한다. 그의 건물들이 거친 콘크리트 속에서 단단한 구조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라즐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싸운다. 그러나 결국 그의 건축은 미완성으로 남지만, 이는 단순한 실패나 좌절이 아니다. 오히려 라즐로의 건축적 과정 자체가 브루탈리즘적 저항과 삶의 투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고수했다. 미완성으로 남은 건축은 그의 철학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투쟁과 신념의 흔적으로 남는다. 라즐로에게 건축은 과정이었지만, 조피아는 그의 삶을 결과 중심의 이야기로 다시 쓰려 한다.
조피아의 마지막 연설에서 그녀는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했다”고 말한다. 이는 라즐로의 철학을 왜곡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을 역사적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는 행위다. 영화는 이를 통해 브루탈리즘과 시오니즘의 변질을 연결한다. 브루탈리즘이 본래 평등과 기능을 추구했지만, 결국 국가 권력과 자본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처럼, 시오니즘도 유대인의 독립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팔레스타인의 희생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조피아는 라즐로의 업적을 기리는 듯하면서도, 그의 삶에서 불편한 부분을 삭제하고, 이를 유대 민족의 승리 서사로 포장한다. 이는 마치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목적을 강조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지운 것과 같은 방식이다.
결국,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한 예술가의 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역사를 쓰는가, 그리고 어떤 기억이 남고 어떤 기억이 사라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라즐로의 건축이 미완성으로 남은 것처럼, 그의 삶도 완전히 정의될 수 없다. 조피아의 연설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충돌하고, 이상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마지막 우리에게 묻는다. 과정 없는 목적지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목적지가 정당화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