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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16. 2024

용서의 언덕에서 용서를 구함

산티아고순례길 4일차

   푸엔테 라 레이나의 입구에 도착해 길가에 앉았다. 다리는 아프고 호텔닷컴이나 구글지도에는 가격이 좋은 숙소를 찾을 수가 없다. 잠시 앉아 있는데 한국인 20대 청년이 다가온다. 청년은 아직 힘이 많이 남았는지 걸음이 힘차다. 종아리도 굵다. 청년과 같이 숙소를 찾았다. 마침 우리 앞에 시설 좋아 보이는 알베르게는 25유로. 너무 비싸요, 다른 곳을 알아봅시다. 청년에게 말하고 5분을 더 걷자 알베르게가 하나 더 나타났다. 저기가 공립알베르게 같아요, 청년이 말했다. 숙박비는 7유로. 내가 찾고 싶었던 '무니시팔(municipal)' 알베르게를 이 청년 덕분에 쉽게 찾았다. 체크인을 하고 침대를 배정받고 일단 누웠다.


   잠시 후 젊은 서양청년 둘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신나게 스트레칭을 하는데,  야 이 새끼들아, 소리 안 낮출래 하는 투로 '턴 다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국남성이 침대에서 일어나 단호히 말한다. 와우, 너무 용감한 한국인, 외국에서 저렇게 소리칠 수 있다니!    


   소리를 친 30대 남자와 나와 같이 알베르게를 찾은 청년이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여기서 만난 사이라고 하는데 둘은 친해 보였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는 기미를 내보이자, 우리 고기 먹을 건데 비쌀 수도 있습니다, 20유로 정도요. 무뚝뚝하고 딱딱하게 30대 남자가 말한다. 나는 점심으로 고기를 먹었으니 다른 걸 먹겠다고 하고 웃으며 둘을 보냈다. 나와 같이 이곳을 찾은 청년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30대 남자는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이다. 20대 청년이 저 사람과 같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보기가 어렵겠구나, 어쩔 수 없지.




   유럽의 구도심은 아름답다는 어제의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아침에 빠져나오는 팜플로나는 신도심도 아름다웠다. 도시의 절반이 공원인 듯했다. 거리에는 마로니에 가로수들이 흰꽃을 가득 피웠다. 마로니에는 가을 단풍도 참 좋은데, 이 도시는 가을에도 아름답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이어서인지 7시가 넘었는데도 길에 차도 사람도 별로 없다.


   공원 같은 팜플로나와 이어지는 몇 개의 작고 깨끗하고 예쁜 마을을 빠져나오자 노란 유채꽃들과 어린 초록 밀들의 평원이 드넓게 펼쳐졌다. 유럽 특유의 오렌지색 지붕의 집들이 가끔 평원 위에 자리하고, 이 평원은 용서의 언덕까지 계속 이어졌다.

   

   평원의 어느 곳에서 어제 점심을 같이 먹었던 아가씨가 나를 따라잡았다. 그녀는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간다며 오늘 어디까지 가냐고 나에게 물었고, 나도 거기까지 간다고 말하자 그러면 오늘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고 한다. 걸으면서 내가 말했다. 왜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에 많이 오는지를 생각해 보았다고.  우리나라는 단시일에 경제성장을 하게 되어 그 부작용으로 너무 과도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염증을 느껴 오는 것 같다고. 외국사람이 물으면 대답해 줄 거라고, 영어로 메모해 두었다고. 좋은데요, 그런데 외국인이 알아들을까요? 그녀가 말하고, 알아들을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언덕 위 어느 마을에서 간식으로 들고 온 오렌지 절반을 그녀에게 주고 잠시 같이 걷다 그녀는 나를 앞질러 보이지 않을 만큼 가버렸다. 저녁식사를 산다고 하고서는.... 내일 또 볼 텐데, 저녁은 또 기회가 있겠지.


팜플로나의 새벽 공원

   

팜플로나를 벗어나자 펼쳐진 평원


   용서의 언덕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언덕 위에 금속으로 만든 순례자 형상의 조형물은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걷는 모습,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에게 참배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 사람들. 나는 왜 이 길을 나선 것인가.... 이곳에서 잘못한 것을 빌면 용서가 된다고 한다. 내가 회사를 나와 당신 혼자 우리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된 것을 아내여 용서하시길. 고등학교 때 아빠가 발로 차고 폭력을 사용한 것을, 큰딸아 용서해 주기를. 어릴 적 강제로 어묵국을 먹게 했던 것을, 둘째 딸아 용서해 주기를. 화장실에서 몰래 입에 든 어묵국을 뱉었던 어린 너를 생각하면 아빠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용서의 언덕, 금속으로 된 순례자 조형물들




   볼륨 낮추라고 소리친, 저녁값이 20유로 할 수도 있다고 투박하게 내게 말한 청년을 보며, '거칠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나치게 거친 것은 나쁜 것이 틀림없는데, 그러면 알맞게 거친 것은 좋은 것일까? 아니면 거친 것은 지나치거나 알맞거나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일까?


   사물의 경우 알맞게 거친 것이 좋은 경우는 있다. 계단에 미끄럼 방지용으로 부착해 놓은 패드는 알맞게 거칠어야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는다. 수세미도 알맞게 거칠어야 설거지가 잘 될 수 있다. 사포도 무언가를 갈아낼 수 있을 만큼 알맞게 거칠어야 한다.


   사람의 경우는? 사람의 성품이 거친 것은 지나치게 거칠든 알맞게 거칠든 그 자체가 나쁜 것 같다. 사람의 성품은 거친 것보다 온화한 것이 더 좋은 품성 상태인 것 같다.


   지금은 새벽 4시 40분. 알베르게의 공용공간으로 나와서 몇몇이 벌써 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내 앞에 인디언처럼 생긴 여인은 핸드폰으로 오늘의 길을 검색하고 있다. 어둠 속에 나서는 새벽의 순례자들. 나와 당신들 모두 오늘 하루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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