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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18. 2024

얼어 죽은 동양인 시체가 발견되었다

산티아고순례길 5일 차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를 않는가. 유리창 너머 내가 있던 곳, 지금은 희미한 불빛만이 켜진 곳을 보며 문을 두드리고 두드렸지만 누구도 열어 주지 않았다. 창문 너머 눈앞에 있는 저 손잡이를 아, 누가 젖혀 주기만 한다면. 나는 굳게 닫힌 철문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멀리 길 끝에 보이는, 언덕 위에 얹힌 하얀 집들의 마을은 천사들의 마을 같았다. 구름 속을 들었다 나왔다 하던 해가 마을 위를 비출 때는 더욱 그랬다. 아직 다리가 아플 때는 아니어서 낭만적인 마음으로 감상했다. 신혼여행 온 부부가 마을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도 찍어 주었다.


   유채꽃과 양귀비꽃이 핀 소로를 지나고, 완두꽃들이 펼쳐진 평원을 지난다. 내 앞으로 마을주민이 틀림없는 청년이 조깅을 하며 나에게 부엔 까미노 한다. 저 사람은 동네주민일 텐데, 저 사람한테 부엔 까미노 답하면 안 될 텐데....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얼마를 걷자 개와 산책하는 여성 둘이 내 앞에 보인다. 나는 그라시아스 말할 준비를 하고 그 둘을 웃으며 보았다. 그런데 그녀들은 웃기만 하고 부엔 까미노 하지를 않는다. 웃기만 하는 사람에게 그라시아스 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더 걸었다. 마을에서 울타리를 손질하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올라, 내가 말하자 할아버지는 부엔 까미노 했다. 올라 하면 올라 해야하는데, 갑작스러운 부엔 까미노에 나는 그라시아스 대신 가라시아스 라고 해버렸다. 가라시아스라니. 가라시아스라니..., 어디를 가라고 가라시아스 하는가.


언덕 위의 하얀 집들, 천사들의 마을 같았다
신혼여행 온 부부의 뒷모습과 부부가 찍어 준 사진





   이 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한다. 세 시간까지는 너무 상쾌하게 좋은 풍광을 감상하며 걷지만 그 이후는 다리가 아파서 경치는 고사하고 그날의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고. 오늘 걸은 길은 언덕 위에 얹혀진 마을 외에는 어제와 비슷한 풍광들이었다. 탁 트인 들판들, 구름들. 하긴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같으면 제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니, 어제와 비슷해서 별로였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호강에 겨워 하는 말일 것이다.


   걷다 다리가 너무 아파 포플러 그늘에서 신발을 벗고 한참을 앉았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모두 나를 보고 부엔 까미노 한다. 당신들에게도 부엔 까미노. 외딴 구름 옆을 비행기가 비행운을 남기며 지나간다. 어디로 가는 비행기일까.


   아침에 출발 직전 알베르게 공용홀에서 며칠 전 부르게테에서 보았던, 동양 외모의 미국인으로 내가 짐작한 녀를 다시 만났다.  웨어 아 유 프람 했더니 싱가폴이라고. 위 멧 비포? 우리 전에 만났었죠? 했더니  예스 하면서 뭐라 뭐라 한다. 그녀의 영어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웅얼웅얼하는 영어다. 나는 가는귀가 어두워 웅얼거리는 말은 우리나라 말도 잘 못 알아듣는다. 웅얼거리는 영어는 공포 자체다. 안타깝다. 당신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 당신은 전생에 나와 별로 상관없는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오늘도 걷고 걸어 목적지인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는 조금 더 걸어 외곽에 위치했다. 숙박비는 12유로. 어제는 7유로였는데  같은 무니시팔(municipal)이라도 시설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 같다. 체육관을 겸한 시설인데 어제보다는 더 쾌적하다. 샤워장도 남녀 구분되어 있다.

   처음으로 티셔츠를 빨려고 코인세탁기 앞에 섰다. 사용료는 3유로. 동전을 처리하고 싶어 50센트 동전을 넣었더니 세탁기가 뱉어낸다. 왜 안되나, 세탁기 문이 열려있어서 안되나..., 문을 닫고 1유로 동전을 넣었더니 동전을 삼킨다. 세탁설정 단추 두 개를 눌렀더니... 어, 어, 세탁기가 돌아간다, 세탁기 문도 열리지 않고 어, 어, 일시정지 버튼도 없다. 티셔츠를, 양말을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 세탁기 돌아간다, 혼자 돌아간다. 3유로만 먹고 혼자 돌아간다.

   분풀이로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탁을 했다. 손을 말리는 드라이어에 빨래도 말렸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관리인이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따라 나오라 해서 나가니 빨래걸이가 있다. 티셔츠와 양말과 속옷을 널었다. 관리인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신기하게 다 알아들었다.


에스테야의 알베르게 외부와 내부 모습

   


   

   저녁을 먹고 8시에 잠들어 12시 반에 깼다. 여기에서 나의 수면패턴은 7시, 8시에 잠들어 12시 혹은 1시에 깨는 것이다. 저녁 먹고 그 시간에 잠이 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침대에 몸을 누이면 10분 내 잠이 든다.

   혹시 별을 좀 볼 수 있으려나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1층으로 내려오니 아무도 없고 자판기 불빛만 있다. 비가 오는구나,  손잡이가 가로로 된 넓은 출입문이 있었다. 손잡이를 밀고 나는 한 발 밖으로 나섰다. 마저 몸을 밖으로 내자 스르륵 철컥, 문이 닫혔다. 순간, 엄청나게 불행한 예감이 번개처럼 스쳤다.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다. 문은 안에서 열리지만 밖에서는 열리지 않았다. 나는 창안을 들여다보며 손잡이를 젖혀보고 문을 두드려도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잠들었다. 비는 내리고 아무도 없다. 나는, 이제 어쩌나....


   오늘은 예약한 알베르게에 배낭을 배달서비스로 보낼 참이다. 배낭이 없이 그냥 걸어도 다리가 아픈 거리이다. 살면서 누구나 자기의 짐을 내려놓고 싶은 때가 있지 않은가. 한두 번 배달서비스를 이용한다고 나의 길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오늘 길을 출발하는 시각, 6시 반에 나는 겨우 실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만약 겨울에 이곳을 왔다면, 아침에 알베르게 문 앞에서 얼어 죽은 동양인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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