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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22. 2024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티아고순례길 7일차

   어제는 다른 날보다 왜 더 힘들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아침에 출발이 늦어서 오후에 걷는 시간이 많았다. 이 길은 오전에 최대한 많이 걸어야 하는 길이다. 출발은 늦어도 7시에는 해야 되고 도착은 가급적 1시까지 하되 늦어도 2시까지는 하는 것이 좋다. 내가 깨달은 요령이다. 4월 오후의 햇빛이 무시 못할 정도로 따갑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물을 뺀 복숭아뼈 밑 물집이 다시 물이 차 부풀어 있었다. 1층침대 독일인 친구 - 이름은 보이스텍 - 가 준 밴드를 그 위에 붙였다. 7시 20분에 출발. 출발선에 있는 표지를 보니 오늘 가는 곳까지는 20.7km, 한국에서 올 때 계획했던 하루치 평균거리. 다른 사람보다 5km 작지만 내게는 만만찮은 거리다.

오늘의 목적지, 로그로뇨까지 20.7km


   물집이 거슬려 조심해서 절뚝이듯 걸었더니 이래서 될 일이 아니다 싶었다. 물집이야 터지든 어떻게 되든 - 차라리 터지면 좋겠다 - 무시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걸었다. 구름이 가득하다. 선선한 것이 걷기에 쾌적하다. 묘지가 나와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 백 년을 살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영원을 살 것처럼 산다. 고대 로마인들은 연회에 앞서 은쟁반에 해골을 받쳐 든 노예가 연회장을 한 바퀴 돌게 했다고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의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끼져 연회를 더 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더 큰 쾌락을 위해 죽음을 눈앞에 가져왔지만, 우리는 진짜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가져 올 필요가 있다. 죽음이 내 앞에 임박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농도가 더 진해진다. 삶의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고 가려있던 꼭 해야 하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살아라,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메멘토 모리.


묘지의 입구
묘지의 내부


   구름이 언제 있었냐며 햇살이 쨍쨍해진다. 이 초록 평원을 보며 '아 좋다, 너무 아름답다' 나는 그런 식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 책에는 미적 인식, 시적 인식을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래 미적 인식을 해보자. 길가의 양귀비꽃은 권총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지는 않은가, 이 초록평원은 혹시 지하감옥에 감금된 선지자의 비밀편지는 아닌가, 이런 생각은 다리가 아파 5분을 가지 못했다.


   소로에 들어서고 커브를 돌자 어디선가 앰프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퀸, 보헤미안랩소디.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지친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소리. 모자를 쓴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쉴 수 있는 탁자도 있다. 이 남자도 혹시 순례자인가? 나는 앉아 오렌지 하나를 먹으며 잠시 감상했다. 연주곡은 알렐루야, 보레미안랩소디, 로망스 세 곡인데 전부 조금씩만 연주한다. 전곡은 연주할 줄 모르나? 그래도 좋긴 좋다. 이국의 길에서 피로를 씻어주는 기타 선율. 잠시 후 나와 전생에 인연이 없던 싱가폴여인이 지나간다. 나도 동전 몇 개를 넣고 다시 걸었다.


버스킹을 하는 기타 연주자


   중간에 푸드트럭이나 작은 마을의 쉴만한 곳들은 있었지만 지나쳤다. 오늘의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고 싶었다. 오후의 햇살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1시경 로그로뇨에 도착, 걸으면서 오늘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날이다.


   숙소에는 배달서비스로 보낸 배낭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내가 좀 일찍 와서 좋지? 배낭에게 말하고는 패딩을 꺼냈다. 파자마로 가져온 저지도 꺼냈다. 너희는 산티아고에 먼저 가있거라. 우체국에 가서 무게를 재니 1kg은 되지 않는다. 직원이 하는 말 중 30일, 45일이라는 말만 알아듣고 45일이라 했더니 비용이 40유로. 돈은 아깝지만, 먼저 산티아고로 보냈다.

  

   숙소 공용홀에서 싱가폴미인을 만났다. 이 여인은 왜 이렇게 나를 따라다니나. 우리는 인연이 아닌데. 내가 나이스 밋 유 어게인 했더니, 내 이름을 묻는다. 마이 네임 이즈 종보 리. 이 정도 영어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그녀는 미쉘이다.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해 주었다. 대화는 여기까지. 미인이라도 웅얼거리는 영어는 부담스럽다. 구도심 거리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발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광장 벤치에 잠시 앉았다 숙소로 왔다.

   

멀리 오늘의 목적지, 로그로뇨가 보인다


로그로뇨 시내의 모습


한국 라면이 있는 로그로뇨의 가게


   새벽 3시, 침대에 앉아서 잠자는 사람들을 보는데, 문득 다 슬픈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이 종교적 이유로 참배하러 가는 사람들일 텐데,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걸어서 고생을 무릅쓰고 가는 것일까. 그것도 여러 번씩. 내 옆 침대 일본인 아저씨는 이번이 여덟 번째라고 한다. 고생은 신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왜 이 고생을 하는 것인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나는 어떤 마음이 생길 것인지.


   배낭은 오늘도 배달서비스로 먼저 보내려고 한다. 다른 이들 모두 배낭을 메고 가는데 부끄럽긴 하지만, 나는 내게 맞춰서 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다간 산티아고까지 가지도 못한다. 나는 나한테 맞춰서 가면 된다. 나이 오십 중반에 그 정도는 알아야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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