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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23. 2024

나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산티아고순례길 8일차

   침대 벽에 직사각형 달빛이 비친다.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보았다. 어릴 때 아버지가 달빛에 개와 새 모양의 손그림자를 만들어 주던 생각이 났다. 혹시 별이 보이려나, 달빛이 밝으면 별이 보이지 않을 텐데.... 창밖을 내다보니 달빛이 아니고 불빛이 들어온 것이었다. 별은 이 나라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숙소에서 처형과 같이 온 60대 부부를 만났다. 세계여행 중인 이 부부는 남미를 몇 달 다녀왔고 이어 아프리카를 갈 예정이었는데, 처형이 산티아고에 같이 가자 부탁해서 왔다고 한다. 5년 전 산티아고에 온 적이 있다는 이 부부에게 절경이나 감탄을 자아내는 풍광이 이 길에 있는지 물었다. 풍광은 지금과 같은 밀밭과 포도밭이 계속 이어지고 환상적인 경치 같은 건 없다고 한다. (TV에서 누군가 환상적인 풍광도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부부는 하루에 20km라도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힘드니 배낭은 배달로 많이 보내고 천천히 가라고 조언해 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집 때문에 산티아고까지 못 가고 중도에 돌아간다고 한다.

   

   어제는 5시 반에 출발했는데 가자마자 낯익은 모습이 신발을 고쳐 신고 있었다. 노숙 아닌 노숙을 했던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청년이다. (청년은 기관사를 하다 배를 타기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취업준비 중이라고 한다.) 발에 물집이 많이 생겨 샌들을 신고 있었고 배낭은 배달로 먼저 보냈다고 한다. 로그로뇨 외곽까지 같이 걷다 헤어졌다. 


오늘의 목적지 벤토사 가는 길


벤토사 마을이 보인다


   가는귀가 어둡지 않아서 내가 영어를 잘 들을 수 있다면. 회사 다닐 때 나는 토익점수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필기는 거의 만점이었는데, 가는귀가 어두운 나는 듣기 점수가 형편없었다. 영어 듣기를 잘 못하는 나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회사 업무에서도 어려움을 느꼈다. 이 길에서도 외국인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인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에도 물집이 생겼다. 새끼발가락은 압력을 많이 받아서 테이핑을 해도 소용이 없나 보다. 내가 산티아고를 너무 쉽게 본 것 같다.

   집에서 나온 지 열흘이 되었다. 한 달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새벽엔 기분이 울적해서 부엌에서 노래를 들었다. 물집만 없다면 좋을 텐데.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는가 보다.


   걷고, 먹고, 자고, 쓰고. 

   걷고, 먹고, 자고, 쓰고.

   이 길에서 내가 하는 것들. 나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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