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길을 나설 때, 헤드렌턴이 없는 나는 다른 순례자들과 같이 나서서 그들 뒤를 따라가야 한다. 오늘 새벽에는 먼저 길을 나서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해 나 혼자 어두운 길을 나섰다. 어찌 되겠지, 생각해 나선 길이었지만 금방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들판, 길바닥이 돌길인지 흙길인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칫 조난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왔던 길을 한참 되돌아가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다른 순례자들이 와서 그들 뒤를 따라갔다.
새벽의 순례길
해가 뜨는 순례길
4월의 아침, 길가의 포도밭
오늘 목적지인 시루에나로 가는 길은 약 두 시간 가량 광활한 밀밭이 펼쳐졌다. 밀밭을 걸어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내내 불편했던 발이 편해지고 걷는 리듬도 생기면서 다리도 아픔이 사라졌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다. 햇빛도 아직은 많이 따갑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같은 밀밭, 같은 구릉인데 갑자기 몸이 상쾌해지면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끝없는 초록과 어딘가로 몰려가는 흰 구름들, 푸른 하늘 속에서 어린 초록밀들이 춤을 춘다. 구릉 위의 나무 한 그루는 나를 보며 다정히 부엔까미노 한다. 어제는 조금 우울했는데, 포기하지 마라고 산티아고가 주는 선물 같았다.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너무 몸이 가벼웠다. 고맙다, 산티아고야. 너에게, 꼭 가도록 할게.
오늘의 목적지 시루에나 가는 길
시루에나 가는 길의 초록 밀밭 1
시루에나 가는 길의 초록 밀밭 2
이 길의 대부분의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들이 다 같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순례자 식사'라는 메뉴가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먹는 이 식사가 편하지 않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참석했지만 이제는 가능하면 참석하지 않는다. 차분한 식사와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왁자지껄 잡담이 대부분이다. 오늘 저녁 내 옆에는 덴마크 중년부부가 앉았는데 그들은 몇 가지 간단한 것만 묻고 더 이상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를 배려하는 눈치였다.
시루에나에서 묵은 알베르게
내일은 다른 날보다 더 많이, 30km를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까지는 걸어야 하는 많은 길들이 남았지만, 하루하루 걸어가는 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