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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29. 2024

4월의 절반과 5월을 걸으며 보냈다

산티아고순례길 11일차

   오늘은 조금만 걸었다...


   세계여행을 하고 있으며, 어제 숙소예약에 도움을 준 분은 허 선생님이다. 숙소에 도착하니 허선생님 일행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안 와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했다고 한다. 늦어도 12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나는 1시에 도착했다. 허선생님이 예약한 2시 식사에 나도 같이 먹기로 하고 샤워, 빨래를 했다.

   허선생님은 sk에서 임원을 하다 식당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서 다른 계열사에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이참에 어릴 때 꿈꾸던 세계여행이나 하자고 부부가 나섰다고 한다. 아내분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 번 보라고 내가 쓴 산티아고 5일차 일기를 아내분에게 보여드렸더니 키득키득하며 읽으신다. 자기들도 세계여행 한 것을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만으로는 기억에 한계가 있더라며. 자기들은 이제는 힘들어 그냥 즐겁게 구경이나 하기로 했지만 나한테는 꼭 계속 쓰라고 권한다.


벨로라도마을을 나오며 본 벽화


   저녁으로 부엌에서 감자와 과일을 먹는데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건다. 어디에서 왔냐고, 자기는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이름도 묻는다. 마이 네임 이즈 종보, 패밀리 네임 이즈 리. 뭐라고 부르면 좋으냐기에 종보라고 부르라 했다. 친구하고 같이 왔는데 자기 이름은 숲(Soup?)이고 친구는 줄리라 한다. 나는 이 할머니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알아들었는데 순간,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 듣나 신기했다. 생각하니 대화내용도 쉽긴 했지만 할머니는 말을 우르르하지 않고 잘라서 하고, 비교적 천천히 말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들의 영어가 좋다. 토익시험도 할머니처럼 말해주었더라면 내가 탁월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에스피노사 직전의 들판


   아침에 발에 테이핑을 하려고 보니 오른 새끼발가락의 물집이 터져 있었다. 어제 미국교포 할머니와 걷던 중에 발이 찌릿!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터진 것 같다. 물집은 꽤 컸지만 아프지는 않다. 이제 아물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조금만 걷고 쉬어가는 날, 평소보다 늦게, 8시에 길을 나섰다. 비가 예보되어 있었고 구름이 많았지만 선선해 걷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발도 괜찮고 몸도 가벼웠다. 오늘은 가방을 배달로 안 보내고 직접 매고 갔다.


   오늘은 조금만 걸었다, 고 계획대로라면 적어야 한다. 여유롭게 느긋하게 걷다 비야프랑카라는 도시에 도착, 구글지도로 숙소를 검색하니, 남은 거리 3km, 그런데 방향이 좀 이상하다. 왔던 길을 돌아가란다. 숙소를 지나와 버렸다. 숙소는 이곳이 아니고 직전 마을이다. 같이 말동무하며 걸어온 젊은 여성이 옆에서 어쩌면 좋아요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지나친 거리 3km, 돌아가는 길 3km, 합이 6km를 의도치 않게 더 걷다니. 졸지에 오늘도 평소와 거의 같은 거리를 걸었다. 오늘은 쉬어가려 했는데... 그나마 몸도 발도 괜찮고 날씨도 선선해 천만다행이다.


비야프랑카 가는 길

     

   700유로를 가져왔는데 120유로 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한 예산보다 많이 든다. 호텔에서 두 번 잔 것이 컸다. 가다 현금을 좀 빼야겠다.


   집에 돌아가면 6월 1일. 4월의 절반과 5월을 걸으며 보냈다, 라고 나중에 기억하겠지. 또 무엇으로 기억될까, 오십다섯의 4월과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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