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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30. 2024

손을 맞잡은 플라타너스 아래

산티아고순례길 12일차

   평소보다 많이, 6시간 잤다. 개운하다. 개운한 피로. 모처럼 꿈도 꾸었다. 눈을 뜨면서, 집인 줄 알았다. 아니구나, 나는 걷고 있는 중이지.


   시골마을의 벤치에 청년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앉아 있다. 손을 맞잡은 플라타너스 가지 아래 노란 티셔츠, 햇빛에 얼굴이 붉게 익은 백인청년이. 무슨 생각을 할까. 불안한 미래에 대해? 자기를 몰라주는 여자에 대해? 아니면 존재의 슬픔에 대해? 청년의 주변에 하나 둘 땅거미가 둘러선다.


아따푸에르카 마을의 생각하는 청년


아따푸에르카 마을의 주민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다. 선착순으로만 접수하는 알베르게에 가기 위해 바삐 걸었다. 한 동안은 속도 빠른 앞사람 걸음만 보고 걷기도 했다. 덕분에 너무 일찍, 11시 반에 목표한 마을에 도착했다. 20km 넘게 걸었지만 더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 과유불급. 접수는 1시부터이다. 배낭으로 대기 줄을 세우고 다리를 풀었다.


숲 속의 노점


   오는 길에 결혼 3년차 부부를 만났다.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 커플인데, 신랑은 덩치가 크고 수염이 많이 났다. 신부는 키가 나보다 조금 더 크고 날씬하다.  부부가 사회복지사 일을, 신부는 장애인 관련, 신랑은 북한 새터민 관련 일을 한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서 멈춤을 가지기 위해 왔다고 한다. 신랑이 88년생이라기에 나는 88학번이라 하고 서로 웃었다. 신랑이 지금 설사 중이라 힘들어한다. 뜨거운 물을 많이 마셔서 대장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교환하고 헤어졌다.

 

사회복지사 부부의 뒷모습

  

   알베르게(숙소)에는 암벽등반을 한다는 미국교포 할머니, 새로 만난 62세, 57세 여성이 같이 들었다. 73세 미국교포 남성도 한 분 있다. 전부 저녁을 사 먹는데 나는 혼자 숙소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처음으로 찐 계란을 해 먹었다. 컵에 계란 하나를 풀고 물을 조금 넣어 레인지에 3~4분을 돌렸다. 소금을 적게 넣는 바람에 싱거웠지만 훌륭했다. 자주 해 먹어야겠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왔다. 종소리가 댕댕 울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에서도 들을 수 없는 종소리를 이 나라에 와서 참 많이 듣는다. 달이 떠 있다. 8시인데 날은 훤하니 저 달을 낮달이라 불러야 하나. 이 나라는 9시에도 해가 있다. 숙소의 한국인들이 카페 마당의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가서 인사를 할까 하다 그냥 둘러 갔다.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하고 왁자지껄 흥겨운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자리가 불편하다. 술도 못 마실뿐더러 가는 귀도 어두워 될 수 있으면 피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듣는 것이 좋을 수는 있지만, 표피적인 일상 잡담만 하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그것을 여행의 기쁨이나 유익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독일에서는 대학 가기 전 학생들이 철학이나 문학 관련 책을 어떤 것을 읽는지. 칸트나 하이데거, 니체, 괴테를 읽는지. 에세이를 쓰는 훈련을 학교에서 받는지.


   5시 반이다. 오늘 글은 다음에 다듬기로 하고 여기까지만. 배낭을 싸고 6시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따푸에르카마을의 들판
오늘 묵는 마을, 아따푸에르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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