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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02. 2024

용감히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산티아고순례길 13일차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저녁산책을 위해 나왔다. 광장을 지나 산타마리아 아치문을 지나면 왼쪽으로는 소형분수와 정원사가 모양을 낸 나무들이, 오른쪽으로는 플라타너스들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다.


산타마리아 아치문을 지나 왼쪽의 분수


   플라타너스들은 약 칠 미터 떨어져 마주 보며 손을 맞잡고 서 있다. 오른쪽의 나무들은 왼쪽으로, 왼쪽의 나무들은 오른쪽으로 가지를 자라도록 유도하여, 마주 보는 나무의 가지를 접붙여 놓았다. 마주 보는 두 나무의 가지가 터널을 이루며 연결되어, 두 나무가 부부처럼 한 몸이 되어있다.


   내 앞의 플라타너스들은 아직 어린잎밖에 나지 않았지만, 조금 멀리로는 잎이 어느 정도 자라 플라타너스잎들이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끌리듯이 걸었다.


   플라타너스 터널 아래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 유모차를 미는 여인들, 벤치에서 대화하는 연인들. 강은 수다를 떨며 흐르고, 터널은 삼백 미터 가량 이어졌다. 터널이 끝나자 아름드리 마로니에들이 백 미터 가량 이어진다. 옆에 늘어선 이차선 도로를 차들이 천천히 달린다.

아직 어린 잎들의 프라타너스 터널


잎이 자란 프라타너스 터널 1


잎이 자란 플라타너스 터널 2


   공원 같은 이 도시의 길을 더 걷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돌아왔다. 오는 길에 종소리가 아홉 번 울렸다. 공기는 시원하고 강물소리는 아직 환하다. 오는 길에 손을 잘못 잡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았다. 마주 보는 나무와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을, 저 아이는 자신의 오른쪽 옆 나무의 손을 잡고 있다. 이해하자. 세상이 요구하는 틀을 거부하고 용감히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손을 뻗은 저 나무를.


   아직 어린잎들 뿐인 플라타너스들도 곧 무성히 잎들을 내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겠지. 우리들 삶의 나무도 그렇게 되기를.




   오늘도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다. 선착순으로만 입장하는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 가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어제 새로 만난, 나보다 두 살 많은 한국여성과 같이 걸었다. 어떤 공단- 예를 들면 도시관리공단 같은 - 에 다니다 휴직하고 남미여행을 3개월 다녀왔다고 한다. 젊을 적에는 아둥바둥 직장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다 무시하고 속 편하게 다닌다고 한다.


   서둔 덕분에 일찍, 11시 조금 넘어 무니시팔에 도착했다. 오픈은 12시. 배낭으로 입장대기 줄을 세우고 현금을 뽑으러 갔다. 오는 길에서는 ATM기계에 출금할 수 없다고 메시지가 떠서 긴장했는데 다행히  출금이 된다. 500유로를 뽑았다.


무니시팔 알베르게 입구에서 보이는 대성당


   알베르게에 입장해 침대를 배정받았다. 한국인은 7~8명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걸으며 보았던 사람도 있다. 샤워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입간판에 한글로 닭강정이라고 쓰여있는 식당에서 점심으로 닭강정을 먹었다. 닭강정 다섯 조각, 콜라 하나에 7유로, 거의 만원이다. 환율이 전보다 올라 물가가 비싸게 느껴진다. 슈퍼에서 진라면 두 개, 너구리 두 개를 샀다. 오늘 저녁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알베르게 부엌에 인덕션이 없다. 다른 날 끓여 먹어야겠다.


닭강정 5조각과 콜라가 7유로, 거의 만원이다


   오늘 묵는 부르고스라는 도시는 옛날 카스티야왕국의 수도로, 우리로 치면 경주쯤 되는 도시이다. 역사유적이 많고 관광지로도 꽤 알려진 도시이다. 오후에 전망대를 오르고 부르고스대성당과 진화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전망대와 부르고스대성당은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다. 아쉽게 시간이 맞지 않아 대성당 입장은 하지 못했다. 진화박물관은 입장할 수 있었다.  어제 묵었던 아따푸에르카에서 백만 년 전 고생인류의 뼈와 생활흔적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는데, 이를 보관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를 느낀다. 신에게 참배를 가는 길에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박물관이라니.



   화장실 거울 속에서 낯선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본 백만 년 전 원시인류 같은. 남자를 데려가 면도를 해 주었더니 많이 보았던 익숙한 얼굴로 변했다. 우리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웃었다.


   힙색이 너덜해져 새로 샀다. 몇 천 원 더 주고 약간 큰 걸 살 걸. 크기가 너무 딱 맞아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괜찮다. 이 길은 불편한 것이 이것 말고도 많으니까. 편하려고 나선 길은 아니니까.


   아침 6시, 길을 나서기 위해 준비를 하는 사람들. 나는 오늘 대성당 내부와 이 도시의 몇 군데를 더 보고 가려한다. 다른 분들 먼저 가세요. 부엔 까미노. 나는 오늘 조금 천천히 뒤따라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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