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보 May 06. 2024

내 속에도 무너진 성터가

산티아고순례길 15일차

   걷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지금 산티아고로 가고 있어요. 구릉도 없었습니다. 초록의 평원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졌고 멀리서 풍력발전기 백여 대가 최선을 다해 돌아가고 있었어요. 바람은 여름 날 냉장고 속처럼 시원하게 불었습니다.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나는 '아, 당신도 같이 보았더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선 어떤 대상을 보고 미적 인식, 시적 인식을 해야 한다고,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태어나서 사과꽃을 처음 본 어떤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구나' 생각했다는데, 나는 이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하늘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여름 날 냉장고 속처럼 시원하게 바람이 불었다는 표현은 좀 상투적이군요. 바람의 순록들, 툰드라의 썰매를 모는 순록들이 나를 향해 쉼없이 달려 왔다, 이 표현도, 차가운 건 왜 맨날 툰드라냐고 당신이라면 말할 것 같지만, 우선 이 문장으로 대신하고 나중에 고쳐야겠어요.



   

   오늘은 맛있은 점심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점심으로 먹을 라면을 들고 부엌에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냄비에 밥을 짓고 있었어요. 오빠부부와 같이 걷고 있다는 그 분은, 누가 버리고 간 쌀이 있길래 밥을 짓는다 하더군요. 라면을 그분들께 조금 드리고 밥을 얻어 맛있게 먹었어요.


   이 마을에는 라면, 김밥, 비빔밥을 파는 유명한 알베르게가 있습니다. 순례자식사로 파는 비빔밥을 그곳에서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한국인 순례자도 많았지만 외국인도 많더군요. 한국의 비빔밥과는 재료가 많이 달라 흉내만 낸 비빔밥이었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이 그리웠으니까요.

   

   배낭은 배달서비스로 미리 보낵고, 오늘은 많이, 30km를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땀도 나지 않았어요. 당신도 같이 이 풍광을 보았으면 생각했던 것도 바람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바람이 몸을 가볍게 해 주어서.

   바람이 진짜 많이 불었어요. 출발할 때부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불었어요. 바람들이 사는 지역인가 봐요. 신화 속 거인족같은 풍력발전기들이 지키고 있는. 당신도 이 길을 걸어봐야 하는데. 그래야 바람 맞는 마음들을 당신도 이해할 텐데.



   카스트로헤리츠, 숙소가 있는 이 마을의 뒤편 높은 언덕에는 흔적만 남은 성터와 무너진 성벽이 있습니다. 옛날 이 성벽 위에서 성주가 백성들을 내려다보거나 적들이 오지 않는지를 보았겠죠. 내 속에도 무너진 성터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성주였던.



   나는 지금 산티아고로 가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당신의 길과 내 길이 한 번 더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 곳에서 나는 또 당신의 길쪽을 보며 멈칫할 것 같아요. 그래도 곧 나는 다시 길을 갈거예요. 흔적만 남은 성터에 더 이상 집착할 순 없어요. 나는 지금 산티아고로 가고 있으니.

이전 16화 세속적인 것들이 햇빛에 씻기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