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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03. 2024

세속적인 것들이 햇빛에 씻기는

산티아고순례길 14일차

   한 방에 든 독일인 앤디, 네덜란드인 프리게츠와 한 식탁에 앉았다. 앤디에게 물었다. 독일에서는 대학 가기 전 학교에서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지, 칸트, 하이데거, 니체 같은 철학자의 책을 읽는지. 배운다고 앤디가 말한다.


   니체는 조금 쉽지만 칸트나 하이데거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학생들이 이해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이 홉 소(I hope so.),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앤디가 답했다. 프리게츠가 옆에서 '아 유 어 티쳐?' 한다. 아니요, 나는 집에서 아내를 위해 일합니다. 아내가 회사를 위해 일하고요. 앤디가 '유 아 하우스맨' 하고 말했다. 프리게츠와 앤디는 독일어로 대화를 하는데, 물어보니 프리게츠가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살아서 독일어를 잘한다고 한다.


   한국에는 매우 유명한 네덜란드인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군지 아세요? 프리게츠에게 내가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한다. 거스 히딩크, 내가 말해 주자, '오, 아이 노 힘(I know him)' 하면서 앤디에게 뭐라뭐라 설명을 한다. 2002 월드컵에서 한국이 몇 등을 했더라..., 프리게츠가 묻자 내가 넘버 포라고 말해 주었다.

   2002월드컵, 나에게는 어제 같은데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라니. 잠시 후 프리게츠가 '거스 히딩크'가 아니고 '후스 히딩크'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래, 네덜란드식 발음은 후스 히딩크였어.


   와인을 한 입 했다. 목이 말라서 흡수가 잘 되는 느낌이었다. 앤디가 묻는다. 잔을 부딪힐 때 한국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건배'라고 나는 말해 주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는다. 잔을 비우라는 의미라고 영어로 말하려 했는데 소통이 잘 안 되었다 . 술을 마시는 제스쳐를 하며 '원샷'이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오, 언더스탠' 하며 둘이 웃는다.


   고기도 두껍고 처음으로 만족한 저녁식사를 했다. 부엌이 없어 라면을 못 끓여먹었지만 덕분에 맛있는 고기를 먹었다. (까미노에서의 스테이크는 대부분 얇고 짰다.) 예약하지 않고, 걷다 멈춘 숙소에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식사와 대화를 했다.


   독일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는지는 몇 번 더 다른 독일인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에세이를 쓰는 훈련도 학교에서 하는지도 다음엔 물어봐야 겠다.


두꺼운 고기, 모처럼 입맛에 맞는 식사.


   오늘 아침엔 느긋하게 움직였다. 어제 못 간 대성당 내부와 부르고스의 대학교, 수도원을 보고 오늘은 조금만 걸을 예정이다. 대성당은 9시 30분 오픈이라 먼저 대학교로 향했다. 어제 저녁에 산책했던 플라타너스 터널과 마로니에길을 다시 걸었다.


   우리나라는 도심과 공원이 경계지워져 있는데, 이 도시는 공원과 도심이 경계가 없다. 유럽의 유서 깊은 많은 도시가 그런 것 같다. 아름드리 나무들 아래,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내 맞은 편에서 걸어 나온다. 숲을 걸어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하는 아침. 이 도시에도 욕망과 경쟁이 있겠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그것들조차 투명하고 사납지 않을 것 같다.


   대학교는 작았지만 깨끗했다. 고풍스런 건물 외관 속에 현대식 인테리어가 자리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나를 보고 부엔 까미노 한다. 당신들도 인생의 길 위에서 부엔 까미노.


대학교의 외부


대학교의 내부


대학교 內 풍경 1


대학교 內 풍경 2


   대성당 입장료는 5유로. 내부는 화려하고 웅장하다. 성화들, 수많은 조각들로 장식된 벽면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햇빛들, 거대한 기둥들. 하루를 기다려 보고가기를 잘했다. 대성당을 본 후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은 대학교 부근이다. 다시 대학교 쪽으로 가야했지만 다행히 까미노와 같은 방향이다. 수도원은 수도원 같았다. 조용하고 인적도 드물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말 그대로 수도원의 분위기. 세속적인 것들이 햇빛에 씻겨지고 있는.


대성당의 내부


수도원 입구


수도원 전경


수도원의 분수대 앞에서


   오후에 걷는 것은 역시 조금 힘들었다. 시원한 새벽과 오전이 확실히 걷기에는 좋다. 다른 순례자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오전에만 걷기로 했나 보다. 1시를 넘어 지칠 때쯤 마을이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알베르게에 들어가 다리를 풀었다.


   방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있다. 할아버지는 미국인인데 나는 코리안이라고 말했더니, '오 위 아 프렌즈' 한다. 우리만 미국을 짝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미국인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마음은 있나 보다.


   조금만 걸으려고 했는데 오늘도 만만찮게 걸었다. 대학, 성당, 수도원을 오가고, 이 마을까지 오는 것도 생각보다 멀었다. 16km 정도 걸었다. 내일은 배낭을 배달서비스로 보내고 30km 정도 걸을 생각이다. 발도 괜찮고 몸도 괜찮다. 맛있는 저녁도 먹었고.

   추억이 될 동영상도 찍어보라고 큰딸이 카톡을 하는데... 어떻게 찍을 지 생각을 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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