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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09. 2024

비에 젖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산티아고순례길17일차

   강변의 소공원 벤치에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에 눈을 떴는데, 짧은 잠이 달콤했던지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어요. 난쟁이 데이지들이 무리지은 풀밭에 아가씨 둘이 대화하고 있어요. 표정이 즐거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서 물어보고 싶네요.


강변 소공원의 풀밭 1


강변 소공원의 풀밭 2


강변 소공원의 분수대


   이 나라의 오월은 홀씨들이 나무를 떠나는 계절입니다. 하얀 홀씨들이 일제히 떠납니다. 오월에 모두 떠나야 한다, 법으로 정해 놓은 것처럼.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들 부지런히 날아가요. 이들 모두 사랑이 낳은 것들이지만 모두 부드러운 흙에 내려 한 생을 꾸려가는 건 아닐 테지요. 아니요, 대부분 아스팔트나 보도, 딱딱한 땅에 내려 고생만 하다 생을 끝낼 거예요. 당신이나 나라는 홀씨는 그래도 운이 좋았지요. 아스팔트 위 좁고 좁은 틈이지만 뿌리를 내릴 순 있었으니 말이에요. 우리들 머리 위로 쌩쌩 차들이 지나가 아찔할 때가 많지만.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도로변만 따라 걸었습니다. 들판은 넓고 하늘도 넓었지만, 차도 아주 가끔만 지나갔지만 그동안 걸은 길을 생각하면 오늘 길은 별로였어요. 괜찮아요. 지금까지 좋았으니까. 모든  것이 언제나 좋을 순 없으니까.

오늘의 목적지 카리온 가는 길


카리온 가는 길가의 들판


   임호택, 김준오 두 분과 어제오늘 일정을 같이 했어요. 같은 숙소에 들어 같이 장을 보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임호택 씨는 증권사를 퇴직한 분으로 나와 같은 고장 출신에 대학도 같아 이야기가 편했어요. 두 분과 같이 어제오늘 맛있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제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어요. 임호택 씨가 가져온 쌈장으로 아주 맛있게. 오늘 저녁은 불이 없어서 레인지에 데워먹는 음식을 사서 먹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같이 한국어를 말하며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슈퍼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나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어요. 꽤 거센 빗줄기였어요.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 있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다리는 것 밖에 없는데. 잠시 후 비는 그쳤어요.  우리가 숙소에 도착해 다시 비는 내렸고요. 임호택 씨의 빨래가 흠뻑 젖은 채 호택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비에 젖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올 지도, 안 올 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러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아, 이건 고도의 이야기와 같으니 그만해야겠군요. 그 연극은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지요. 올 지, 안 올지 모르는 고도라는 사람. 당신도 고도같았어요.


카리온 시내의 예배당


   산티아고 가는 길이 이제 거의 반을 왔어요. 많이 걸었어요. 오늘이 17일째니까요. 생각해 보니 일정에 조금의 여유가 있어요. 조금 천천히 걸어도 될 것 같아요. 산티아고에서 파리로 가는 교통이 여의치 않아 돌아갈 때는 마드리드를 경유해 파리로 가야겠어요.


   당신이 계신 곳에 비가 많이 왔다고 들었어요. 비를 좋아하는 당신, 일 년 내내 비 내리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당신은 지금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겠군요. 물속에 잠긴 것 같은 도시의 거리를 말이에요.


   사람들이 오늘도 길 떠날 채비를 하네요. 나는 조금 더 누웠다 준비를 해야겠어요. 당신도 오늘 하루 잘 보내세요. 우리 모두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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