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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10. 2024

순례길의 반을 넘어섰다

산티아고순례길 18일차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몇 개월씩 장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벌써 집이 좋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진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쪽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회복지사부부를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이 부부도 참 많이 마주친다. 남편의 설사는 멎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라 그런지 이 부부는 내외가 둘 다 붙임성이 좋다. 사회복지사의 직업세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갑질하는 상사, 실적, 경쟁.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닌데도 사기업과 같은 면이 많다. (웃으면서 누가 잠꼬대를 한다. 외국어라 알아들을 순 없지만, 기분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이해 안되는 대한민국이다. 모든 곳에서 경쟁한다. 공무원, 교사, 공기업... 경쟁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조차 경쟁을 하고 실적관리를 한다. 아니면... 내가 아직도 세상에 대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부부와 저녁을, 닭찜 비슷한 요리를 같이 먹었다. 이 나라 사람들, 음식을 너무 짜게 먹는다. 내 입에는 소금탕이다. 헤어지며 부부가 고추장과 뜨거운 물만 부으면 국이 되는 스프를 두 개 주었다. 요즘 보기 드문 인정 있는 젊은 사람들이다.


아침에 카리온 마을을 빠져나오며 1


아침에 카리온 마을을 빠져나오며 2


   오늘은 조금만 걷고 좀 쉬려고 했다. 출발 후 나타나는 첫 마을에 머무르려고 했는데, 마을이 너무 작아 더 걸었다. 그러다보니 평소와 다름 없는 19km를 걸었다.

   지금 이 곳은 숙소때문에 순례자들이 애를 먹고 있다. 1시까지 머물려는 마을에 도착하면 숙소를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더 걸어 다음 마을까지 가거나 사정을 말하고 거실이나 복도에 재워 줄 것을 부탁해야 한다. 나보다 일찍 나서 한 마을을 더 간 준오씨는 복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도 거실 바닥에 다섯 명이 매트를 깔고 자고 있다. 물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이고 까미노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문제될  건 없다.

오늘 목적지 레디고스 가는  길의 들판


오늘의 목적지 레디고스 가는 길 1


오늘의 목적지 레디고스 가는 길 2


   보니엠의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면서 잠시 걸었다. 바빌론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네.  가사는 성경의 시편 137편을 인용한 것이다. 곡은 흥겹지만 가사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제국의 노예생활을 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픈 내용이다. 길 위에서 너를 생각하며 춤을 추었네.


오늘 묵는 마을, 레디고스 입구


   숙소에서 벨기에 젊은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너희 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느냐. 대학 전공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배우기도 안 배우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옆 침대 덴마크 아저씨에게도 물었다. 조금 배운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의무적으로 배운다고 하더라, 내가 말했더니, 기초적인 내용만 배울 거라고 그가 다시 말했다. 칸트, 하이데거, 헤겔 이런 철학자의 책들은 어려운 책들이다. 독일이라고해서 고등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다. 독일인을 만나면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새벽이 쌀쌀해 긴팔티 위에 반팔티를 입었다. 조금 낫다. 패딩을 산티아고에 먼저 보낸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은 소용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사용하면 된다.


   800km 순례길의 반을 넘어섰다. 이제부터는 남은 길이 걸어온 길보다 짧다. 길의 끝은 정해져 있고 하루하루 남은 길은 더 짧아진다. 산티아고. 길의 끝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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