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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13. 2024

왜 까미노를 걷는지에 관해

산티아고순례길 19일차

   오늘은 기부제 알베르게에 들었습니다. 한번은 꼭 묵고 싶었던 곳입니다. 까미노의 기부제 알베르게는 주로 성당에서 운영합니다. 신부님 한 분과 자원봉사자 몇 분이 관리하며 저녁식사는 자원봉사자와 순례자들이 같이 준비합니다. 원칙적으로는 무료이지만 순례자들의 기부를 받아 운영비로 씁니다. 오늘 먹는 순례자들의 식사는 어제 묵었던 순례자들의 기부로 마련되는 것입니다.


알베르게 내부의 모습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돕는 순례자들


알베르게 마당의 빨래들


    저녁식사 후에 스무 명 정도가 신부님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였습니다. 촛불을 들고 돌아가며, 왜 까미노를 걷는지에 관해 각자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말해도 되고 영어로 말해도 된다고, 필링(feeling), 느낌은 전달되기 때문에 관계없다고 진행자는 말했습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말하는 사람,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는 사람, 버킷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 걷는 것이 좋아서 왔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신에 대해 궁금해졌다는 사람.... 나는 산티아고가 나를 불러서 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힘센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겼다고.

   모임 후 다 같이 뒷동산에 올라 노을을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나라에서 저녁노을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네요. 8시를 넘으면 잠들기 바빴으니까요.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 사람으로 치면 어느 시기쯤일까요. 우리는 삶의 길에서 몇 시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모임 후 본 다 같이 본 노을 1


모임 후 다 같이 본 노을 2


   션은 스웨덴 사람입니다. 나는 헤드랜턴이 없기 때문에 5시 반에 길을 나서려면 헤드랜턴을 한 이의 뒤를 따라야 하는데 오늘은 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푸른 어둠 속에 달빛이 내려앉은 들판을 보며 우리는 걸었습니다. 뷰티풀,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션을 따라 나도 몇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션과 같이 본 새벽 달빛의 들판


   션은 작가라고 합니다. 그는 이번 까미노가 세 번째이고 까미노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세 번씩이나 왔는데 다음에 또 올 것 같냐 물으니  오브코스, 물론이죠 말하더군요.

   두 권의 철학에 관한 책을 썼고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하고, 프로이트, 칼 융같은 심리학자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했어요. 프로이트는 발음이 너무 달라 처음엔 못 알아들었는데 이름의 스펠링을 듣고 겨우 알아차렸어요. F, R, E, U, D. 스펠링조차 발음하고는 너무 달라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는 걸음이 너무 빠르다고, 내가 못 따라올 거라고, 미안하지만 먼저 간다 말하고는 쓩- 가버렸어요. 돌아보지도 않고 쓩- 정말 가버리더라고요. 당신은 내게 그러지 마세요. 나에게 보폭과 속력을 맞추세요..., 내가 당신의 보폭과 속력에 맞추겠어요. 나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요.


   임호택 씨가 나와 김준오 씨와 함께 하는 단톡방을 만들었어요. 준오 씨는 까미노에서 발목이 삐끗해서 고생 중인데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고 임호택 씨가 말해 주었어요. 의사가 이틀 정도 쉬라고 했답니다.


   이곳은 새벽 5시 반입니다. 그곳은 12시 반이겠죠. 당신은 나보다 7시간 앞서 있군요. 내가 7시간을 걷지 않고 뛰어간다고 해도 당신은 거기 없을 텐데. 문득 당신과 나 사이의 이 시차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지네요.

  

   잠시 후 6시 반에 간단한 아침을 먹고 7시에 순례자들과 신부님, 봉사자들 다 같이 작별인사를 합니다. 참 따뜻한 경험입니다. 보석 같아요. 주섬주섬 사람들이 일어나네요. 나는 이제 잘 걷고 잘 있습니다. 당신도 남은 오후를 잘 걸으시고 잘 계세요.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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