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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14. 2024

세속적인 많은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산티아고순례길 20일차

   세상에 대해 자신만만한, 확신에 가득 차 타인을 설득하려는, 와인 한 잔 대접하면서 자신의 등산장비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한테 낮에 잠시 붙들렸다. 다행히 잠시였다. 길어지면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나왔을 것이다.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드는지 새벽에 그가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간다. 고소하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들으며 걸었다. 이 노래에는 나름 시적이려고 노력한 표현들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면, 지난날의 얼굴들이 꽃잎처럼 펼쳐져 간다, 많은 날들을 빗물처럼 흘려보낸다, 눈물 너머 돌아다본다, 날아가는 새들처럼 마음이 부푼다, 같은 가사들, 이런 노랫말들은 평이성에서 벗어나는 표현들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가사처럼, '빗물처럼 흘러가' 버린, '마주 보며 속삭이던 얼굴들' 나에게 있었나... (갑자기 누군가 코 고는 소리, 거대한 탱크가 지나간다).


순례길의 새벽


   마주 보며 속삭이던 얼굴은 아니지만, 젊을 적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얼굴이 있었다. 신입사원이던 나를 예쁘게 보아주던 팀장. 세속적 욕망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낭만적인 면도 있고 문학적 소양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그, 둘 다 회사를 그만둔 후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와 재회했을 때 그는 폐암 3기였다.

   삶의 의지는 강했지만 그는 끝내 암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상태가 좋다, 좋지 않다를 반복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세속적인 많은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 아니 내려놓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는 보였다. 그의 부음을 듣고 나는 문상을 가지 않았다. 어느 날의 대화에서 그에게 나는 '여럿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특별한 하나'였다. 그에게 나, 나에게 그는 같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후회된다.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주지 않은 것이. 전영이 부른 노래처럼 레테의 강을 건너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아침의 순례길


800km로 시작한 순례길이 이제 327km로 줄어들었다


   오늘 다시 만난 독일 아가씨 라거사에게 물었다. (어제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앞서 만난 적 있다고.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가씨였다.) 독일에는 헤겔, 칸트, 니체 같은 뛰어난 철학자들이 있는데, 독일의 고등학생들이 그들의 책을 읽는지.  그녀가 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칸트의 경우, 읽긴 하지만 책의 일부분만을 읽는다고. 그래, 유럽이라도 고등학생이 그렇게 어려운 칸트나 헤겔의 책을 전히 읽을 수는 없다. 이 질문은 이제 그만하자.

   다시 그녀에게, 왜 까미노를 걷느냐 물었다. 그녀는 친구, 가족, 취업 등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해결책을 찾을 것 같냐 물으니, 어떤 방향이든 좀 더 나은 상태는 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녀가 나에게도 물었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지. 책에서 산티아고를 처음 알게 되었고, 내가 망설일 때 아내가 권했다고 했다. 훌륭한 아내라고 그녀가 말했다. 맞다. 나의 아내는 훌륭한 사람이다.


   오늘 걸은 길은 어제와 같다. 왼편은 플라타너스, 오른편은 차도. 차도라도 차는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않는다. 나는 플라타너스가 좋다. 손바닥처럼 넓적한 잎들이 만드는 초여름의 그늘이 나는 참 좋다. 대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그 그늘 아래에서 나의 젊은 날들. 빛나고도 어두웠던 나의 나날들.


오늘 묵는 마을 레리에고스 입구


레리에고스 마을의 모습


   다음 목적지는 레온이라는 큰 도시이다. 임호택 씨는 그곳 우체국에서 후배가 준 프라이팬을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보낼 참이다. 발목이 아픈 김준오 씨와 호택 씨와 나, 세 명이 같이 늦은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800km의 거리가 곧 300km대로 접어든다.  길의 끝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별이 빛나는 들판의 산티아고. 그곳에서 나는 빛나는 별 하나 내 속에 갖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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