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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May 17. 2024

비도 안 오는데 판초우의를 걸친 이방인

산티아고순례길 23일차

   어제이야기부터 해야 될까 봐요. 어제 길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차도 옆에서 매연을 맡으며 걸었어요. 이런 길은 유네스코 심사 때 감점이 많이 되었을 것 같아요. 숙소로 든 San Martin 마을도 유럽의 정취라곤 하나도 없는 건조하고 메마른 분위기의 마을이었어요. 가게도 카페도 하나뿐인 정말 작은 시골 마을.




   임호택, 김준오 두 분과 일정을 같이 하다 그저께 레온에서부터 여자 한 분이 더 동행하고 있어요. 당신과 동향이고 나이도 같아요. 이 분은 산티아고로 갔다 모로코로 갈 거래요. 여기 온 사람들 전부 역마살이 든 사람 같아요. 다들 집에 갈 생각을 안 해요. 하긴 나도 다른 이들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죠.


   날씨가 갑자기 차가워졌어요.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그런가 봐요. 우리 나라 태백시만큼 고도가 높은 것 같아요. 패딩을 산티아고우체국으로 먼저 보낸 게 살짝 후회되었어요. 비는 안 오지만 추위 때문에 판초우의를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방풍, 보온, 든든했어요. 없는 것을 아쉬워해봐야 소용 있나요. 희랍 속담처럼, 주어진 것을 선용하면 돼요.


   까미노의 표지는 노란 화살표입니다. 벽이나 바닥에 페인트로 그려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 사람들은 걸어요. 흙길 바닥에는 돌로 표시해 둔 화살표도 가끔 있어요.

   한참을 걸었어요. 어느 순간 화살표도 없고 주위에 순례자라곤 나 뿐. 길을 잘못 들었지만 그래도 당황되진 않았어요. 산티아고는 서쪽에 있으니까 서쪽으로만 가면 크게 벗어나진 않아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는 서역으로 가는 혜초 같군요.) 더구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구글맵도 있잖아요. 내심 조금 좋기도 했어요. 그동안 너무 문제없이 밋밋하게 걸은 것 같아서. 순례길의 돌발상황 같은 것도 체험해 보고 싶어서.


길을 잃고 들어선 마을


   구글맵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며 예정에 없던 마을을 걸었어요. 이 도시에 순례자, 이방인은 나뿐이에요. 비도 안 오는데 판초우의를 걸친, 동방에서 온 이방인.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겠어요. 순례자는 올 일이 전혀 없는 마을에 든 제가 말이에요.


   차도를 벗어나 논밭길로 들었어요.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 그늘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침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와 과자를 꺼내 먹었어요. 짙푸른 하늘에 구름과 나. 혼자 생존여행을 하는 기분, 알 것 같았어요.


   방향을 가늠하고선 언덕을 가로질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언덕에 올라 소로에 들자마자 곰만 한 개 네 마리가 달려와 내 앞에서 짖어댔어요. 두 마리까지는 감당할 수 있겠던데... 네 마리는 차마 자신이 없더군요. 물러나서 다른 길을 탐색했어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마을할아버지가 불렀어요.... 까미노 데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저쪽으로 가라고 말했어요. 그라시아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길을 잃고 있던 중 할아머지를 만난 마을


길을 잃고 언덕을 가로질러 가려 할 때 개가 앞을 막았다


순례길의 십자가. 까미노에는 이런 십자가들이 많았다.


   할아버지 덕에 나는 다시 괘도에 들었어요. 사실 노란 화살표를 다시 찾은 순간, 살짝 아쉬움도 있었어요. 이미 충분히 많이 헤맸는데도 말이에요. 그래도 일부러 길을 잃는 건, 재미없어요.


   소나기가 오락가락해서 판초우의를 다시 입었어요. 처음엔 짐만 되고 쓸모없다고,  버리고 싶던 판초우의가 이렇게 요긴하게 사용될 줄이야. 미니멀라이프를 하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건 버리지 말고 남겨야 되겠어요.


   중간에 과일, 음료수, 빵을 두고 파는 자율판매점이 있었어요.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목이 마르기 시작하는 포인트에 절묘히,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이 있더군요. 나는 수박 세 조각을 먹고, 한 조각에 오백 원 쳐서 1유로를 내었어요.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나타난 자율판매점


   오늘 숙소에는 거의 두 시가 다 되어 도착했어요.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늦었어요. 길을 잃고 헤매느라.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요.


   며칠 전 일기에 손바닥처럼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들이 만드는 그늘 아래, 빛나고도 어둡던 내 청춘의 날들이라고 적을 때,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내 젊은 날이 그렇게 어둡기만 했던 것도 아닌데... 당신도 젊은 날을 떠올리면 나와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나요? 아니면 나만 그런가요?


   발가락엔 물집이 생겼어요. 어제 하나, 오늘 하나. 테이핑이 되지 않은 빈 틈에 생겼어요. 크진 않으니 걱정은 마세요. 교만하지 마라는 경고 같아요. 걷는 것에 요즘 조금 자신이 생겼거든요.

오늘  묵은 아스토르가 마을의 광장


    지금 당신의 시간은 11시이겠군요.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후 평화롭게 보내세요. 나도 잘 걷겠습니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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