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보 May 16. 2024

두 계절이 충돌 없이 사는 곳

산티아고순례길  21일차

   걷기 시작한 4월 말에 이틀 정도 내리고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의 4월과 5월에 이렇게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는군요. 길을 걷는 순례자에게는 고마운 날씨지만 농부에게는 야속한 가뭄입니다.


   레온에서 그늘은 차고 햇볕은 따갑습니다. 패딩을 입은 사람들과 반팔인 사람들이 나란히 거리를 걸어요. 두 계절이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요, 아무 충돌 없이. 우리도 이곳에서 살았더라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다른 두 계절이었던 우리가 말입니다.


레온의 구시가지 거리
레온의 도로 가운데 분수


   레온대성당도 웅장합니다. 앞서 본 부르고스 대성당만큼은 아니지만요. 대성당들의 웅장함도 좋지만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나는 좋아요. 유리를 통해서 비치는 색색의 햇빛들. 아름다운 속이 없다면, 웅장하기만한 겉모습이 무슨 매력을 가지겠어요. 웅장한 겉과 아름다운 속, 둘 다 가지기를 누구나 욕망할 테지만.... 겉은 볼품 없지만 아름다운 속을 가진 것, 겉만 멋지고 속은 초라한 것. 둘 중에 선택하세요. 겉도 속도 멋진 것,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레온 대성당의 외관과 스테인드글라스
레온 대성당의 내부


   너무 비싼 점심을 먹어버렸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순례자의 호사는 이번으로 끝이었으면 해요. 음식은 삶에 얼마의 비중을 가질까요. 음식은 중요해요, 음식이 가장 중요해요, 음식도 중요해요, 음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나는 음식에 관해선 감각이 무디지만 음식이야기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영혼은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 감각촉수만, 혓바닥만 있는 사람같아요.


   당신과 대화는 즐거워요. 당신과 대화하면 나는 수다쟁이도, 말 않는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듣는 사람이 돼요. 당신과 나는 감각적인 것들과 정신적인 것들을 적절히 말해요. 우리가 신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대화예요. 혼자 대화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사람, 맛집이나 와인 같은 감각적인 것만 말하는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좋아요.


레온 가는 길의 들판


   길 위의 풍경은 어제와 비슷했어요. 오른편은 차도, 왼편은 플라타너스, 그래서 길에 관해선 당신에게 할 말이 별로 없어요. 풍광은 처음 걷기 시작한 열흘 정도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이대로 걸으면 계획했던 일정에서 7일 정도 여유가 생겨요. 이 속도로 계속 걸을지, 어떻게 할 지 생각중이에요. 이만 줄여요. 오후 잘 보내세요.

이전 22화 세속적인 많은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