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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19. 2024

물집이 생겼다

산티아고순례길 6일차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 큰 물집이 생겼다. 발가락만 물집 방지 테이핑을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위였다. 오늘 아침까지 마찰이나 다른 전조증상을 전혀 느낀 적도 없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큰 물집이 생겼다. 물집은 터뜨렸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팀 중 한 명이 물집도 터뜨리고 연고도 바르고 밴드도 붙여주었다. 한국에서 선교를 오래 했다며 한국어도 잘하는 미국인이었다. 내 침대 밑 독일 청년은 물집을 보고는 큰 밴드 다섯 개를 주었다.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닫힌 문을 야속하게 보며 노숙 아닌 노숙을 한 뒤 출발하느라 너무 바쁜 아침이었다. 배낭은 배달서비스로 예약된 숙소로 보낸다. 봉투에 숙소 이름과 주소를 적은 후 6유로를 넣고서 가방에 묶었다. 구름이 많다. 판초우의를 챙겨야겠다. 점심 먹을 것, 간식, 이것저것 챙기니 귀찮은 무게가 되지만, 입에 넣으면 없어질 것이라 그냥 챙겼다. 출발.


   배낭이 없어도 오늘은 시작부터 다리가 무겁다. 빗발은 아주 가끔씩 내리지만 판초우의를 쓸 만큼은 아니다. 대장장이가 직접 전통 방식으로 기념품 등을 만들어 파는 대장간, 크리덴셜(순례자여권)에 찍는 스탬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순례자의 코스인 것 같다. 작은 마을에서 부리가 노란 까마귀를 보았다. 스페인 동부부터 네팔까지 사는 까마귀라고 한다. 부리가 노란 까마귀를 상상이나 했을까. 여행자의 눈에는 이런 것도 신기하다


부리가 노란 까마귀


   스페인의 마을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많은데, 키가 5미터 정도로 일정하다. 높이가 비슷하도록 가지치기를 한 것 같다. 잎은 아직 나지 않았는데 여름이 되면 키가 같은 플라타너스들이 그늘을 만들며 늘어설 것 같다.

   

   오전에는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많았는데, 오후에는 그늘도 없는 쨍쨍한 길이 오래 계속되었다.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배낭이 없어도 다리는 아프다. 바욘역과 팜플로나 성당 앞에서 잠시 보았던 60대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현대증권을 다니다 퇴사한 대구 사람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으니 나도 다리가 아픈 것을 잊었다.

   푸드트럭에서는 현대증권 60대와 부산에서 온 60대 부부, 그리고 내 또래로 보이는 미국인 교포 여성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산부부에게서 유익한 팁, 끼니에 도움이 되는 것과 배낭에 관한 것을 들었다. 감자를 낱개로 사서 반을 잘아 렌지에 10분 정도 돌리면 삶은 감자처럼 된다는 것. 그리고 가져온 짐 중 필요 없고 짐만 되는 것이 있다면, 최종목적지인 산티아고우체국에 보내 맡겨놓으면 된다는 것. 짐을 찾을 때 보관료만 내면 되는데 한국인의 짐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오늘 예약한 숙소는 산솔이라는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묵는 곳은 로스 아르코스라는 도시이고, 산솔은 그다음 도시이다. 로스 아르코스를 지나 산솔까지는 2시간 거리인데 그늘 없는 쨍쨍한 평원이 계속 이어졌다. 다리는 아프다. 풍광은 좋다. 좋은 상황인지 좋지 않은 상황인지 헷갈린다. 터벅터벅 걸었다. 그냥 생각 없이 터벅터벅. 마지막 30분은 길을 잘못 들어 자동차도로를 걸었다. 가끔 차가 나를 지나 하늘 속으로 달려갔다.

  

산솔 가는 길 1

   

산솔 가는 길 2

   

   숙소에는 먼저 온 배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해 걱정했을 나의 배낭. 너도 쭈그려 앉아 기다린다고 애썼다. 앞서 저녁을 사겠다고 한, 부산아가씨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강수진. 이선생님이나 종보쌤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나는 말했다. 오늘에야 통성명을 했다.


   물집이 내일 걷는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오늘 나는 힘들었는데, 내일까지 평균거리를 걸어보고 힘들면 좀 쉬어 가야겠다. 배낭은 내일도 배달서비스로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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