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언덕 위 성페르민성당 옆, 벤치에서 어린 연인들이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깔깔거리더니 한 번 더 키스를 한다. 일어나서 갈 듯하더니 남자가 또 한 번 더 키스를 한다. 웃으며 여자는 주먹으로 남자의 어깨를 두드린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그런데, 맞은편 벤치에서 중년의 여자 둘이 벤치에 앉아 역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날씨는 좋았는데, 당황스러웠다. 배낭 안에 모셔온 판초우의를 진짜 사용하게 될 줄이야. 판초우의를 펼쳐 입고, 방수용 각반을 차고 출발했다.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반길 만큼의 비가 내렸다. 출발하는 길 위에서 회색 두꺼비 한 마리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길게 엎드려 비를 맞고 있고, 소똥들이 비를 맞으며 몸을 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팜플로나까지 가는 길 내내 비는 내렸다. 굵어지다 가늘어지다를 반복했지만 굵어질 때도 걸음을 방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우리나라에서 생각할 때는 비가 오면 조금만 걷고 숙소로 빨리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겁먹을까 싶어서인지 하늘은 아주 조금 불편할 만큼만 비를 내렸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다. 대로가 나와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 몰라 멈춰 서서 뒷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경찰 순찰차가 길가에 선 나를 보고 다가와서 뭐라 말을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더니 경찰도 영어를 못한다.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로 알겠는데 그다음은 무슨 말인지. 다행히 다른 길에서 나타난 사람들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어제 저녁 내 침대 2층에는 김제에서 온 내 또래 여성 한 분이 들었다. 부드럽고 밝은 인상을 가진 여성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 여행을 왔다는 이 여성은, 한국인들이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이 오냐고 외국인들이 묻는데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은지 난감하다고 한다. 나는 웃으며, 성스러운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라 했다. 그리고 돈도 좋아한다고. 우리나라 사람이 왜 이곳에 많이 오는 것인지 나도 사실 궁금하다.
12시를 조금 넘어 팜플로나에 도착하자 비는 그쳤다. 팜플로나 전에 비교적 큰 도심이 나타나 나는 그곳이 팜플로나인 줄 알았다. 뒤따라오던 필립이 팜플로나는 아직 30분 정도 더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필립이 고맙긴 했지만 나는 필립과의 대화가 다소 부담스럽다. 그도 영어가 서툴고 나도 서툴고, 대화는 별로 매끄럽지 못하다. 어제 길 위에서 잠시 눈인사를 나누었던 아가씨가 나타났다. 나는 얼른 필립을 피해 그녀에게 붙었다.
그녀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기 전 여러 곳을 다니고 싶어 왔다고 한다. 잠시 후 팜플로나에 도착해 점심을 같이 먹었다. 카페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식사만 하고 얼른 그곳을 나왔다. 가는귀가 어두운 나는 시끄러운 곳은 빨리 나오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콜라와 샌드위치 2인분 계산은 어른인 내가 했다.
팜플로나로 가는 길, 비가 내렸다
팜플로나 입구와 점심을 먹은 카페. 카페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숙소를 예약해 둔 것은 여행 2일차인 어제까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까지 숙소를 예약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상황이 안되면 팜플로나를 지나 다른 마을에 묵으려고 생각했다. 팜플로나는 대도시여서 숙소가 많을 거라고 바욘의 기차에서 누가 말해주었는데, 좋은 가격대의 빈방은 없었다. 팜플로나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언제 다시 이 도시에 올 수 있겠는가. 큰맘 먹고 15만 원 하는 호텔을 잡았다. (숙박비가 생각보다 자꾸 많이 든다. 그렇지만 식비는 생각보다 작게 드니 위로가 된다.)
팜플로나 시내로 나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으로 먹을 바나나, 토마토, 오렌지, 샌드위치를 각 두 개씩 사들고 한참을 광장에 앉았다. 어둑해지니 사람들이 많아진다. 유럽도시의 구도심은 아름답다. 중세의 흔적이 남은 골목, 성당과 성채.
김제아줌마를 광장에서 마주쳤다. 바욘역에서 잠시 만났던 중년아저씨도 만났다. 아저씨는 벌써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고 한다. 길에서 자주 본 예쁜 동양 외모의 미국인아가씨는 벌써 앞서 갔나 보다. 우리는 모두 이제 시작, 다 함께 부엔 까미노 합시다.
팜플로나 광장
팜플로나 시내
야구모자를 샀다. 판초우의를 입으니 라운드챙보다는 야구모자가 나을 것 같았다. 파스를 사서 엉덩이에 붙였다. 뜨뜻해지기 시작한다. 오늘도 대부분 앞뒷사람 시야에 없이 혼자 걸었다. 모두 다리 힘이 왜 그리 좋은지. 아가씨들도 나를 추월한다. 내가 추월하는 사람은 할머니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