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쯤 쉬어가기 위해 담벼락 그늘에 아무렇게 앉았다. 어제 슈퍼에서 산 과도로 어제 슈퍼에서 산 오렌지 하나를 배낭에서 꺼내 깎았다. 쉬어갈 때 먹으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과도는 껍질을 관통해 엄지손가락을 스쳤다. 하마터면 크게 베일 뻔했다. 피는 조금 났지만 쉽게 지혈되었다.
내가 오렌지 껍질을 마지막으로 깐 것이 언제였나?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언제나 아내가 깎아 준 오렌지를 나는 먹어왔다. 오렌지뿐만 아니라 모든 먹는 것 일체를 나와 아이들은 아내로부터 제공받았다. 아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나라는 개체를 유지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음식물 섭취에도 나는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두 딸은 기본적인 생활 정도는 잘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회사를 나오고, 아내가 우리 집의 경제를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 15년을 넘는다. 한때 아내와 나의 관계는 심하게 어그러진 적이 있었다. 경제력은 없지만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나는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나름 노력했는데, 내가 너무 미웠던 아내는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은 때가 있었고, 그런 사태는 극단적인 싸움으로까지 번진 적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는 차츰 회복되었고 지금 아내와 나는 매우 튼튼한 밧줄로 묶여 있다. 그 밧줄이 연민의 밧줄일 수도, 존경의 밧줄일 수도, 또 다른 무엇의 밧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내는 다시 태어난다면 나와는 한 번 더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아내는 혼자 살겠다고 한다.) 나는 아내가 없다면 개털이다. 아내는 나의 주인이며 나의 모든 것이다. 온 우주를 통틀어 아내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바욘역에서부터 나에게 말을 걸어온 포르투 남자의 이름은 필립이다. 어제 슈퍼까지 같이 가며 알게 되었다. 나는 필립이라는 이름은 매우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고, 유럽에는 필립이라는 이름의 왕들이 많이 있었다고, 혹시 너는 왕의 가족이 아니냐고 하자 필립은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오늘은 약 30분간 필립과 같이 걷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나 혼자 걸었다. 앞선 사람도, 뒤에서 오는 사람도 내 시야에 들어오는 일 없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걸었다. 가끔 뒤에서 몇몇이 나를 추월해 갔지만 나는 어제처럼 어리석은 경쟁은 하지 않았다. 나와 그들의 시간표는 다르다. 나는 나의 페이스, 나의 시간표에 맞춰 걸으면 된다. 더구나 다리도 아파 다른 이들을 따라잡을 힘도 없었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아침 막 걷기 시작할 때에는 기분이 좋다. 공기는 상쾌하고 다리에 힘도 많고. 이런 쾌적한 상태는 세 시간이 되면 없어지기 시작해 네 시간이 되면 완전 소진된다. 그 후부터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다리가 아파 웬만큼 좋은 풍광이 아니면 좋다고 느낄 수도 없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 나라의 길을 걷는 것은 좋았다. 가끔씩 제주의 비자림 느낌이 나는 숲도 있긴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다지 누가 봐도 멋진 풍광은 없었다. 우리 동네의 솔마루길보다 조금 나은 정도. 사진도 찍은 것도 없다.
2시경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일찍 도착해서 인지 오늘은 일층침대를 배정받았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햇반, 멸치반찬을 먹으려고 한다. 조금 일찍 비밀병기를 푸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배낭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오늘 길은 평지일 줄 알았는데 대부분 내리막이었다. 물집방지테이핑을 하지 않았다면 애를 먹을 뻔했다. 내일은 팜플로나에서 묵을 생각이다. 팜플로나는 소몰이축제로 유명한 대도시이다. 여기에서 거리는 약 19km. 오늘보다는 조금 덜 걷게 된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을까. 그럴 리가. 아침에 나오면서 숙소에 모자를 두고 왔다. 택시를 타고 모자를 가지러 갈까 하다 택시비가 더 나올 것 같아 포기했다. 모자가 없으니 편하기는 더 편한데, 내일 캡을 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