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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11. 2024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순례길 1일차

   피레네산맥을 넘어 오후 3시반에 부르게테라는 시골마을의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한 후 샤워를 하고 속옷과 양말을 빨아 널었다. 코인세탁기가 있지만 직접 손빨래를 해봤다. 물이 너무 차서 꼼꼼히 빨지도 제대로 행구지도 못했다. 사월의 물이 이렇게 차다니. 다음에는 코인세탁기를 한번 이용해 보아야 겠다. 침대에 몸을 뉘였다. 5시. 침대는 이번에도 또 2층. 허벅지가 많이 아프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한 번 탄 것 같다.



   아침 7시에 숙소의 아침 -바게트, 치즈, 커피-을 대충 먹고 길을 나섰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 길)의 시작이다. 오늘 걷는 길은 나폴레옹이 스페인 정벌을 위해 피레네산맥을 넘어간 길, 일명 나폴레옹루트라 불리는 길이다. 아침공기는 맑고 깨끗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의 전형이다. 이 길은 초입부터 오르막이 시작되더니 한 시간 가량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처음에 내가 일정거리를 두고 따라가려 했던 사람은 저 앞으로 앞서 나갔고 내 뒤의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처음에는 그들을 따라잡고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막을 올랐지만 결국 포기하고 내 페이스대로 걷기로 했다. 한정된 것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들과 경쟁하려 했을까. 참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


   한 시간 가량의 가파른 오르막 후에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오르막이 힘들다 싶으면 평지가 나오고 그러다 다시 또 오르막이 나오는 패턴이 한동안 이어졌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평지가 한동안 계속될 때는 걷기에 너무 수월했다. 아래로 보이는 초록구릉들과 그 사이의 집들. 앞에는 거칠 것 없는 시야와 초록들판에 핀 민들레꽃과 키작은 야생화들. 사람들 간의 간격도 좁혀졌다 넓혀졌다 하면서 나 혼자 걷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간격이 한참 이어지기도 했다.


   고도가 높은 데도 완만한 구릉이 펼쳐지고 구릉엔 잔디처럼 초록이 깔려 있다.  금발에 굵은 다리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다리만 안 아프다면 더 낭만적으로 느껴졌을 풍광들.


출발지 생장의 알베르게(순례자숙소) 내부의 모습


생장의 순례길 출발점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1. 오르막이 끝나고 한동안 평지가 이어졌다.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2.  높은 고도에 펼쳐진 완만하고 부드러운 구릉들.


피레네산맥에 핀 키작은 야생화들

   내 조금 뒤를 한국인이 틀림없는 여자 한 명이 걷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눌러 써서 처음엔 나이대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계속 보니 젊은 여자였다. 왜 혼자 여기를 왔을까.  궁금했지만 말은 걸지 않았다. 한참을 그 상태로 걷다 어느 순간 간격이 좁아지고 나와 그녀가 나란히 되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최근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기도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녀는 모태신앙이라고 했다. 그밖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더하다 오르막에서 간격이 벌어졌지만 나는 그 간격을 좁히려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길에서 몇 번은 더 마주칠 것이 틀림 없다. 뒤따라오던 그녀는 내리막에서 나를 추월해서 갔다. 오늘의 목적지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숙소를 찾으러 가고 나는 예약된 숙소를 향해 30분 가량을 더 걸었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무래도 나의 좌충우돌의 기록이 될 것 같다. 오늘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의 일은 오늘 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숙소에서 샤워와 빨래를 하고 침대에 한 시간 가량을 누웠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저녁은 알베르게(순례자숙소)에서 추천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고, 아침은 과일을 사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부근의 수퍼마켓을 향해 가는데 누가 아는 척을 했다. 내가 숙소의 방에 들어설 때부터 나를 아는 척하던 이상한 남자였다. 그도 내일 아침거리를 위해 수퍼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같이 길을 가면서 그가 말했다. 자기를 모르겠냐고, 며칠 전 바욘역에서 5시 기차를 기다리면서 같이 이야기를 했잖냐며. 나는 못알아봐서 미안하다, 사실은 긴가민가했다고 말했다.


   엄청난 일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수퍼에서 오렌지와 바나나를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없다! 지갑이. 수퍼에서 나와 다시 숙소로 가는 길, 온갖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빨래를 하다 흘렀나, 집에는 무슨 돈으로 돌아가나, 대사관에 연락 해야 하나. 숙소의 직원도 누가 맡긴 지갑은 없다하고, 빨래터, 침대, 복도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 밖에 없겠구나. 체념을 하고 방에 와서 눕는 순간, 침대에 펼쳐 놓은 침낭 속에서 부드러운 사각형이 만져졌다. 아, 살았다. 나락에서 천사가 나를 건져내었다. 숙소 직원도 수퍼 사장도 정말 다행이라고 말해 준다.  잠시 아픈 걸 잊었던 허벅지도 감각이 돌아와 다시 아프다. 해피엔딩을 감사해야 할지...


   허벅지가 아프다. 그래도 내일은 평지니까...  길 위의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모두 부엔 까미노(부엔: 좋은, 까미노: 길) 웃으며 말한다. 나도 내일부터는 좀 웃으며 인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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