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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보 Apr 09. 2024

여정의 출발점, 생장에 도착하다

산티아고 출발 하루 전

   이 여행을 떠나기 직전 공연한 짓을 한다는 마음이 든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더 나이 들면 못 가. 여행은 좋은 거야.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여행은 일상의 번잡스럽고 사소한 일들로부터 벗어나 평소에 생각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게 한다. 동일한 현상이라도 여행자는 거주자와 다르게 보고 느낀다.


   이 여행의 출발지, 생장에 도착했다. 이 여행은 출발지에 서는 것부터 힘들구나. 직전 도시, 바욘에서 만난 중년 한국남성 둘은 지하철 파업 때문에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선 나는 바욘에 일찍 도착해 그런 일은 없었지만 작은 일은 오늘도 하나 있었다. 그나마 큰 일이 아닌 건 다행이다.
   오늘 일은 어제와 반대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아 생긴 일이다. 파리에서 7시에 고속열차를 타고 11시에 바욘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관광안내소처럼 생긴 곳에 줄지어 몰려갔다. 출발지인 생장까지는 이제 한 시간 거리, 출발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지 않고 역 밖으로 나갔다. 어제 고생한 마음도 달래고 고풍스런 이 도시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유유히 산책을 한 후 점심을 먹고 역으로 돌아와 기차표를 끊으러갔다.

   그런데, 앞서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려 몰려갔던 곳은 관광안내소가 아니고 기차매표소였다.  사람들이 몰려간 건 기차표를 미리 끊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12시 반, 현재 가능한 기차는 5시 출발. 살짝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몰려가는 까닭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제는 사람들을 따라가서 일이 생기고 오늘은 따라가지 않아 일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국의 이 여행은 돌발상황이 계속 생기는구나. 당황만 하지 말자', 이제 나는 무얼 해야하나.... 바욘에서 가볼만한 곳을 검색했다. 바욘이 어떤 도시인지도 검색했다. 바스크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런 소도시, 가볼만한 곳은 성모마리아대성당, 역사박물관. 두 곳 다 약 1.5키로 거리, 조금 전 내가 기차에서 내려 갔던 곳 부근이다. 가자. 바욘 구경이나 해보자.

   성모마리아대성당은 꽤 크다. 오랜 세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의 외관, 햇빛에 비치는 스테인드그라스와 성화들, 웅장한 기둥들. (이런 성당들은 여행기간 동안 숱하게 본다고 하니 놀라지는 말자.) 문득 7년 전 남프랑스 가족여행 중 우연히 들어간 성당의 멋진 성가대가 생각났다. 성가대 연습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서양인 특유의 아름다운 음색과 화음이 너무 아름다웠다. 뜻밖에 얻은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성당을 나와 시가지 이곳저곳을 그냥 걸었다. 아담한 소규모 식물원, 요새로 보이는 성벽길. 역사박물관은 공사중이다. 기차시간이 늦어진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덕분에 바욘의 속을 보는 기회를 가진다.

   시가지 한 복판 성벽 옆 큰 나무 그늘 밑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평일 낮인데 사람들이 많다. 이곳 애들은 학교도 안 가고 어른들은 일도 안하는지. 사람들은 모두 밝아 보이고 바람은 시원하다. 성당의 종소리가 두 번 울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좋다. 예상치 않은 선물 같다.

   희랍의 속담이 생각났다. 주어진 것을 선용하라. 이 속담이 있기 전 고대의 희랍인들은 신들의 장난감이나 하루살이들에 불과했지만 이 속담 이후 고대희랍인들은 인간에 대한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은 신처럼 존귀한 존재는 아니지만 주어진 조건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차선의 존재는 될 수 있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해 본들 부질없다. 그 환경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된다. 늦어진 기차시간이라는 환경을 이용해 바욘의 내부 구경을 나는 만들었다.


   서양사람들은 말이 왜 이렇게 많은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앉았는데 옆의 포르투갈 사람이 자꾸 말을 건다. 짧은 말은 알아듣지만 길게 말하면 잘 못 알아듣는데, 단어 몇 개만 알아듣고 대화를 하려니 힘들다.


   마침내, 마침내, 출발점인 생장에 도착했다. 생장은 작은 산골마을이다. 순례자 사무실에 가서 순례자여권(크리덴셜)을 발급받았다. 예약해 둔 숙소는 구글지도의 힘으로 비교적 쉽게 찾았다. 체크인을 하고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으로 이만원 가까이하는, 비싸기만 하고 맛은 없는 수프와 스파게티를 먹었다.

   내일부터 걷기 시작이다. 순례길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첫날의 피레네산맥 넘기. 경치는 정말 좋다고 하는데... (지금 시각 새벽 4시 48분. 3시부터 이 글을 썼는데 어제도 오늘도 시간이 많이 든다. 이번 여행은 될 수 있는대로 기록을 남기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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