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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학도의 변론

당신도 억울한 게 있소?

by 닭죽


먼저 이런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오. 내가 욕을 하도 먹어서. 한 오백 년 정도 먹었나? 조상님들 뵐 낯도 없고 수치스러워서 자결이라도 할래도 이미 죽은 몸이 한 번 더 죽을 수도 없고. 뭐 거하게 해 먹은 것도 아니고 기생년, 아차, 말실수요. 춘향 씨, 성낭자 좀 희롱한 대가로 대대손손 변 씨들의 면을 더럽히고 있으니 참으로 억울한 바가 있소.


먼저 여러분께서는 당대 사회상을 아셔야 할 것이오. 양반과, 평민, 노비, 기생의 신분이 철저히 나뉘어 있어서, 물론 약간 왔다 갔다 하는 혼란기에 있다고는 하나 우리 양반들 입장에서는 하여튼 관례 같은 것이 있었다오.


관례란 무엇인가 하니 남들 하는 만치로, 더할 것도 못할 것도 없이 튀지 않는 것이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사는 고도의 처세술이라 할 수 있소. 나 변학도, 사서삼경을 가슴에 새기고 삼강오륜을 상투에 꽂고 다니는 초개같은 지조의 선비지만 처세술만큼은 남못지 않소..


그러니까 다들 내가 여자를 밝히느니, 남의 여자를 탐내느니 무슨 상종 못할 악적 마귀인 것마냥 손가락질하지만 갓 부임하여 관내 기생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 중이었음을 밝히는 바요. 응당 사또라면 자신이 부임한 고을의 접시 숫자, 젓가락 개수까지 잘 챙기고 살펴야 함이 아니겠소? 기생들 얼굴도 익히고 또 부임 첫 날의 권위를 보이는 자리이기도 하거늘 춘향이 그것이, 아니라 성낭자께서 그만 이 상남자 변학도 체통에 찬물을 확 끼얹어 버린 것이오.


그걸 두고 넘겼으면 어찌 되었겠소. 이방, 아전은 물론 거리의 민가까지 소문이 나서 사또 변 아무개는 지조 높은 성아무개에게 찍소리도 못하더라 정승댁 아들을 빽으로 지니면 기생이라도 권위가 사또보다 높네 마네 하면서 사또의 명을 앞에서는 네, 네 하고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무시하기 일쑤였겠지. 당시 조선의 민도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이하였으니 내 말이 일단 맞소이다. 맞다고 치고…


내가 더 억울한 게 뭐냐면 다들 내가 이몽룡, 성춘향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방해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오. 허허, 참. 어린아이들 데리고 구라를 쳐도 유분수지. 성인이 되어서 머리가 트이고 알만한 사람들이 춘향전을 읽어봤다면 다들 알 것이오. 몽룡이 이자식, 이새끼가 얼마나 음흉하고 속이 구린 놈인지 아시오? 남자들은 아시지? 이놈 춘향이 버리고 한양으로 튄 거요. 돌아올 생각은 일도 없었수다.


다시 돌아올 생각 없었다는데 내 열 손가락을 다 건다! 돌아올 놈이면 애초에 춘향일, 버리고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어떻게든 한양으로 데려갔겠지. 기생 딸년… 이 아니라 성낭자만 홀로 남원에 두고 떠난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나 변학도가 모르겠소? 주변 동네 대감님들 다 불러다 물어보시오. 누구나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오. 춘향이는 버림받았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지 버림받은 줄 지만 모른다.


나쁜 놈은 이몽룡 그 개자식이오. 버렸으면 끝이지 왜 다시 돌아오고 난리야. 그 상그지 같은 새끼가 어쩌다 장원급제 하였는가. 나는 거기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보오.


조선의 과거 제도가 그리 만만하지 않소. 재주 좀 있다 하는 양반가 한량들은 무조건 과거 시험에 목매달지 않소? 일단 공부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는 데 최소 십 년이 걸리고 기출문제 암기하고 응용 복기하는데 드는 세월은 기약이 없소. 그렇게 머리 터지게 익히고 집어넣은 것을 까먹기 전에 때 좋게 과거 시험이 열려야 하고, 시험관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거나 베푼 게 있어야 채점 시 유리하다는 관례도 있지. 그렇게 천시, 지시, 인시를 모두 갖추고 조상의 덕은을 보태어 과거 시험의 끝자락으로나마 급제하여 나처럼 한 고을의 수령 자리에 오르는 성은을 입게 되는 것이오.


몽룡이는 춘향이 버리고 올라가 공부에 손을 놓고 방황했다 하였는데 갑자기 마음을 다잡고 공부해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조선의 선비들은 죄다 머릿속에 지푸라기만 들었는가? 저 이몽룡이가 장원급제하기 위해 어떤 더러운 협작과 개수작이 있었을지, 이 변학도는 상상도 못 하겠소. 비록 그럴 리는 없지만 설사 몽룡이 불세출의 천재라 본인의 실력으로 장원급제를 했다고 하여도, 본시 수많은 낙방과 좌절의 고배를 마시며 선비는 그 과정에서 세상의 험난함을 깨닫고 자연스레 사회화도 되고 함께 사는 법에 익숙해지게 되는 법이오. 몽룡이처럼 제대로 숙성되지 못하고 장원의 단 과실을 따먹은 이는 제 잘난 줄만 알고 함께 사는 법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된 관리라 하겠는가.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포졸 놈들이 외칠 때도 하나도 겁 나지 않았어. 나는 당당했거든. 사또가 정무적으로 주최하는 정기적인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제아무리 암행어사라도 지가 뭐라 참견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술 한 잔 할 수도 있고. 다만 털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그때 나는 춘향이를, 아니 성낭자를 옥에 가두고 있었고, 춘향이 미친년이 이몽룡이 아직 자길 사랑한다고 믿고 뻗대고 있었고. 이몽룡은 그저 건수 하나 올리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모든 걸 이 변학도가 옴팡지게 뒤집어쓰게 된 것이지…


몽룡이는 사실 춘향이 기억도 가물가물 했을걸? 딱 보면 알잖아? 춘향이가 한양으로 보낸 편지 읽고 겨우 옛 여자 기억 떠올린 거지. 거지 분장을 하고 가서 월매도 떠보고 춘향이도 떠보고. 기억도 안나는 애가 자기한테 지조를 지키다 감옥에 갇혔다 하니 신기하기도 했겠지. 옥에 갇힌 춘향이 만나서는 내내 마음이 어떤가 떠보려는 생각만 가득하지 않소? 기억 안나는 사람은 춘향전을 다시 읽어 보구려.


이몽룡은 춘향과 연을 끊으려고 했소. 그래서 거지분장을 하고 간 거지. 월매 속을 긁고 춘향일 떠보기나 하면서. 월매한테는 그게 먹혔는데 춘향이 년한테는 약발이 안 먹힌 거야. 자나 깨나 도련님 생각, 걱정하며 사는 게 이유인 년인데 멋모르고 들으면 감동할 만도 하지. 몽룡이 놈도 사람인데 제가 되려 춘향에게 못할 짓 했다 싶기도 했을 테고.


알고 그랬다면 요망한 년이고, 아니라면 그냥 미친년인데 물론 내 생각엔 그냥 미친년이야. 미친년은 상종하면 패가망신하는 법인데 내가 미처 못 알아본 거지…

죄송하오 조상님들. 미안하오 후손님들. 이 변학도가 안일하여 대대손손 누를 끼치었소..


그 후엔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요.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성춘향과 이몽룡은 성혼을 하였소. 이 변학도가 없었다면, 결코 맺어지지 않았을 그들이, 시대와 신분을 초월하여 맺어진 것이지.


그러니 나 변학도, 탐관오리의 전형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중매쟁이였다 해야 할 것이오. 물론 결혼의 책임은 각자에게 있는 법이니, 몽룡이 자네에게도 한마디 묻겠네. 집착 쩌는 독한 여인과 결혼해 보니 어떻던가? 행복하였는가? 이 변학도보다는 행복했어야 할 걸세, 하하하하.





변학도의 입장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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