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미 없는 삶

살기 위한 의미

by 닭죽

요새 마음이 좀 쫄리는 상태입니다.

1년 3개월 전, 10년 동안 운영하던 한의원을 그만두고

1년은 푹 쉬고 그 이후에 일을 알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쉬는 동안에는 글을 실컷 써보고 싶었습니다.(별로 못 썼습니다.)


1년을 채우고 나니 이사 문제가 닥쳐왔고 이사를 하고 나니 아이들 입학 수속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3월이 되니 이제는 아무래도 빨리 돈벌이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주변에 양도 매물 나온 한의원도 다녀 보고, 부원장이나 대진 자리 나온 곳들에 지원해 보고 있습니다.


집 바로 앞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한의원에 부원장 구인 글이 있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십몇 년 만에 써 보는 거라 머리를 싸매고, 짜증도 적잖이 내면서 적어보았습니다.


그 한의원에서 연락은 없고, 똑같은 구인글이 다시 올라옵니다. 저는 서류 탈락인가 봅니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평가 같아서 마음이 생각보다 울적했습니다. 사람의 자존감과 자신감은 남의 평가에 의지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1년 전 일을 그만 둘 때는 어떻게든 내 가족 건사하고 잘 살 수 있겠다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스멀스멀 자신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안감이 채웁니다.


대진 구하는 곳에 몇 군데 문자를 넣어 두었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대진 자리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어필할 것인가 고민하다 보니 잠이 안 오는 밤입니다.


1년 동안 쉬면서는 그리 열심히 쓰지 못했던 글을 요 근래 열성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틈이 나는 대로 적어 봅니다.


마음이 쫄리고 급하니 글을 적고 있습니다.


한 때,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보고 실패를 많이 겪어 본 삶을 동경했던 적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도 믿었고 젊을 때 이것저것 많이 실패해 보아야 다시 일어서는 힘도 생기고 사람이 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해 왔고 실패해도 머리 깨지지 않을 곳에서만 엎어졌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게 보이는 걸요. 아프기 싫고 지기 싫고. 뭐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개중에 용기 내어 도전하는 자도 있고, 아예 계산 없이 움직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


실패는 무의미, 무가치란 말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요새 글을 쓰면서 삶에 진정 무가치한 일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사 때문에 책장을 정리하면서 책을 많이 버렸습니다. 과거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서 더 이상 필요 없거나 안 읽을 책들도 버리고, 디지털이나 다른 경로로 소장할 수 있는 책들도 버렸습니다. 버리는 과정에 책장 한 칸 정도 차지한 노트들을 보았는데 책을 다 버려도 그건 절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무렵부터 틈틈이 적어온 기록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기로 시작했다가 이런저런 아이디어들, 대다수는 짧은 이야기들 (물론 완결되거나 긴 이야기는 없고요), 독후감도 있고, 당시 좋다고 생각했던 어떤 책 내용의 필사 기록도 있고.


그 기록들을 들춰 보는데 마음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가지고 있네. 수많은 실패의 기록들.'


쓰다 만 이야기들,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책장 한 칸을 채울 정도이고 그 시기는 사춘기 지나 고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에 걸쳐 있습니다. 비록 몇 달, 몇 개월 씩 공백은 있더라도 쓰는 행위 자체는 꾸준했던 것에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물론 완성된 작품은 하나도 없으니 모두 실패의 기록들입니다.


요새 쫄리는 마음이 심해지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글을 적고 고치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심청전을, (현대인의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용왕이나, 옥황상제, 봉사가 눈을 뜨는 기적을 없애고(재해석) 써보면 어떨까 싶어서 글을 적어보고 있습니다. 대충 얼개를 구성하는 걸 마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서 헉헉댔지만 뼈대는 만들어졌고 (전에 한 번도 이 정도까지 써본 적은 없었기에 자신을 칭찬했습니다.) 이제는 자꾸 반복해서 읽으면서 미진한 부분을 고치거나 추가해 보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나 작품이 상업성을(금전적 가치) 지니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고치고 고치다 보면 시간 들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겠죠.


어릴 때 게임을 참 좋아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의미 없는 노가다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키우기 위한 노가다들. 그 게임이 끝나면 리셋되어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낭비인데 어릴 때는 그런 것도 재밌었습니다. 글을 고치는 행위도 그런 노가다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게임노가다로 단련되었으니 글 고치는 것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 생각하자 아무 의미 없던 어린 시절 게임노가다가 다시 의미를 찾았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점(dot)을 연결해서 만들어진 결과를 떠올려 봅니다. 하나하나 의미가 없는 점들이 연결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캘리그래피와 컴퓨터와 애니메이션의 조합으로 아이폰이 탄생했습니다.


신은 계획이 있으시다. (god always have a plan.)


듣기 좋을 때도 있으나 참 얄미운 말입니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듣는 내 기분에 따라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일 수도 있고, 세상 듣기 싫은 쓸데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계획이 있으시다. 로 말을 바꾸면 어떨까요? (you have a plan.)


당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 I have a plan.


<나는 계획이 있다.>


내가 겪어온 모든 무의미해 보이는 삽질들은 내 계획의 일부였던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


말장난이라도 해보면서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의미가 있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으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변학도의 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