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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유영 May 22. 2022

학교인 듯 학교 아닌

홈스쿨링에도 공동체가 있다

  

   학교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곳이 아이의 사회성을 기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친구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한창 친구들을 만나야 할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학교 안 가면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나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어울려 놀았다. 다만 친구들을 만나는 곳이 학교가 아닌 홈스쿨링 모임이었을 뿐이다. 나는 아홉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이 모임에 참여했다. 중간에 1년의 공백기도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 내가 속한 사회는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웠다.


   모임의 규모는 제법 컸다. 봄학기와 가을학기로 나뉘어 매번 등록 혹은 휴학을 할 수 있었다. 메인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협력 모임(코업, CO-OP)이었다. 이는 창조부터 종말까지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커리큘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시대별 역사를 따라가며 문학, 과학, 철학 등 여러 영역도 함께 살펴보았고, 연령대를 기준으로 나눈 단계에 따라 활동 내용을 조금씩 달리했다. 또한 매달 새로운 성품을 배우고 가정에서 훈련하도록 했다. 수요일에 하는 수요 프로그램도 원하는 대로 신청해서 참여할 수 있었다.





   

   홈스쿨링 모임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매주 화요일 코업이 끝난 후 진행되던 자녀 프로그램이다. 가족이 함께하는 전체 모임 이후 자녀들끼리 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각자의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초등학생 때는 숲학교, 중학생 때는 글쓰기와 스포츠 클럽을 신청했다. 그중 글쓰기 수업에서 신문을 읽고 글을 쓰는 법을 배우며 글쓰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인원이 열댓 명 남짓이었던 그 수업은 외부에서 오신 강사님이 진행하셨다. 강사님은 우리가 신문에 실리는 이슈들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수업에는 매주 집에서 기사 스크랩을 해와 그것을 브리핑하는 시간이 있었다. 메인이 되는 내용은 수업 시간에 강사님이 주신 신문 기사를 가지고 찬반토론을 한 후, 기사에 대한 요약과 찬반 입장을 정리한 글을 써오는 것이었다. 글을 써가면 하나하나 펜으로 첨삭을 해서 돌려주시고 글을 고쳐 가서 다시 피드백을 받곤 했다.


   신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나의 주장을 펼치는 글을 쓸 줄도 몰랐던 나는 그 수업을 통해 많이 성장했다. 어떠한 논점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는지를 배웠고, 그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법도 배웠다.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지는 짜임새 있는 글을 많이 써 보았기에 대학에 가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한결 수월했던 것 같다. 당시 강사님으로부터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듣던 것이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수요일마다 하던 독서 모임이다. 연대기, 영어, 과학, 토론 등 매 학기 바뀌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이 독서 모임만은 거의 쉬지 않고 꾸준히 했다. 여러 개의 조로 나뉘어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나눔 하는 식이었는데, 그 조에 속한 어머니들이 한 주씩 돌아가며 책에 대한 과제를 내주시곤 했다. 각 조마다, 어머니들의 스타일마다 과제가 달랐지만 독후감만은 거의 매번 작성했다. 소설책만 좋아하던 내가 그나마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독서 모임 덕분이었다.


   고전 문학은 물론이고 역사, 자서전, 과학, 종교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다. 물론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그 시절 포트폴리오 파일을 뒤적여 보면 그때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곤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썼던 독후감은 유치하거나 단순한 것들이 태반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 나이에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어 나름 흥미롭다. 당시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느끼기도 한다. 


 



   세 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코업에서 하던 발표이다. 한 달에 한 번씩 그때의 커리큘럼에 관련된 (주로 역사와 관련된) 주제들이 주어졌다. 그 주제를 가지고 자료를 조사하고 PPT를 만들어 모임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 발표를 맡았던 것은 아마 열두 살, 열세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자료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 필요했다. 첫 발표는 그렇게 부모님과 사촌 언니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마쳤다. 그 이후 발표 준비를 거듭하고 다른 친구들의 발표도 참고하며 나는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책을 여러 권 빌려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은 그 주제에 대한 공부가 되었다. 극히 내향적이던 내게 사람들 앞에서 홀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은 정말 스트레스였지만, 이것이 나의 소심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나이가 되었을 때 자유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한 학기에 걸쳐 모든 학생들이 매주 몇 명씩 자신이 자유롭게 선정한 주제로 발표하는 일종의 프로젝트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작가인 C.S. 루이스에 대해 조사했다. 어렸을 때부터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나니아 연대기>를 읽으면서도 작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발표를 계기로 나는 C.S. 루이스라는 기독교 변증학자이자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이스의 어린 시절, 무신론자였던 그가 회심하는 과정, 그리고 루이스와 톨킨이 함께한 문학 동아리 '잉클링스'. 발표 준비를 하는 일이 그만큼 흥미롭고 즐거웠던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파고들며 알아가는 즐거움을 그때 맛보게 되었다.






   이 같은 프로그램들을 동생들, 친구들, 언니 오빠들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서로 가까워졌다. 학교처럼 교실에서 종일 어울릴 수는 없었지만 같이 과제하고 활동하며 형성한 공감대가 끈끈했다. 매주 모임이 끝난 후에는 아이들끼리 근처 공원으로 우르르 몰려가 술래잡기를 하며 놀곤 했다. 중학생 나이까지도 그렇게 공원에서 뛰놀았으니 정말 건강하게 논 셈이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와 좋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학교생활 자체에 대한 갈증은 별로 없었다. 공부를 덜 해서 뒤처지고 있다는 조급함을 느낀 적도 거의 없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성적의 변화를 눈으로 볼 수도 없었지만 내가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조금씩 달라짐을 느끼곤 했다. 또한 내 주변의 친구들도 같이 성장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자라 가고 지식이 쌓이고 삶의 가치관이 어렴풋이 생겨나는 시기. 그 시기에 우리는 홈스쿨링을 했다. 각 가정의 홈스쿨링은 그 색이 정말 다양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협력 모임이 더 의미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가정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 그 다름 덕분에 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설되었고 더 풍성한 생각의 공유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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