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 그리스보다 빠른 민주주의 국가 건설
2. 이스라엘, 그리스보다 빠른 민주주의 국가 건설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탄생시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12지파 족장이 땅을 분할해 통치하고 종교의식에서만 유대를 같이 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지파연맹은 종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즉 신만을 주권자로 모시면서 모든 지파가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연맹은 王을 따로 세우지 않고, 지파들의 대표에 해당하는 판관(判官)을 민의로 ‘선출’하였습니다. 판관이 지파연맹에 관한 전반적인 사안들을 담당하며, ‘상원’과 ‘대중회의’를 소집하고 안건을 제안해 심의했습니다. 상원은 입법체일 뿐 아니라 사법권도 행사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연맹 체제는 대략 2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이는 신앙으로 뭉치고 지파들 사이에 평등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판관 시대에는 국가의 권한보다 지파의 권한을 강조하던 지방 분권 시대였습니다. 각 부족은 장로가 지배하지만 그들을 중재해 통괄하는 일을 판관이 했습니다.
판관은 유사시 외부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 전체를 구하는 군사지도자 역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평등 이념을 기초로 한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보다 400년이나 앞서 민주주의 제도를 실천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신이 모세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를 보내 惡으로부터 구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뒷날 구세주 개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 빈곤한 경제로 시작하다.
소규모의 농사와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는 주변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한 형편이었습니다. 문명 형성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江도 요르단 강을 포함해 몇 개 되지 않거니와 그나마 수량이 부족해서 이집트 나일 강변에서 행해지는 대규모의 곡물 농사는 불가능했습니다.
농사 외에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생업은 목축이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주된 가축으로 하는 산악 지대의 목축 외에도 넓은 초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골란고원 지역에서 소들도 많이 방목 했습니다.
지중해 해안에는 페니키아의 전통으로 어업이 발달했고 갈릴리 호수에서도 어족이 풍부해서 어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2차 산업으로는 직물류와 돌그릇, 토기 등 그릇류가 생산되었습니다. 구리에 첨가해 단단한 청동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주석은 소아시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되는데, 이를 구하기 위해 그들과 교역을 해야 했습니다.
(2) 사해의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하다.
다행히 이스라엘은 교역을 위한 소금이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사해(死海) 바다 남단에 에돔(Edom) 왕국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은 전통적으로 요르단강이 동쪽 경계를 이룹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이 강은 주변의 여러 작은 개천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로 모이게 됩니다. 직선거리로는 100여 km밖에 되지 않지만, 그것의 3배나 되는 거리를 굽이굽이 지나 마침내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로 지중해 해수면보다 약 400m나 더 낮고, 염분이 25%로 바다보다 9배 정도 더 높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땅에는 이렇게 ‘소금 바다’가 있었기에 교역이 가능했습니다. 고대의 소금은 금값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습니다.
(3) 팔레스타인인과의 악연.
이삭이 살던 시기에 남부 해안에는 바다의 민족인 필리스틴(Philistine) 사람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청동무기를 쓰고 있을 때 이들은 이미 철제무기를 썼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가나안에 정착했고, 원주민들에게 마차와 철제무기를 소개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에 충돌과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전투를 치렀고,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성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훗날 다윗과 싸우는 블레셋 거인 장수 골리앗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가자지구도 고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건설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인 입장에서는 호락호락하게 가나안 땅의 지배권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가 지금까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만났던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강한 적수였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삼손도 그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죽자, 12지파 중 삼손을 따르던 ‘단 지파’는 해체되었고 당시 이미 또 다른 지파인 ‘유다 지파’는 필리스티아에 종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인들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생각해냈습니다. 좀 더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외부에서 적이 침략했을 때만 일시적으로 판관이라는 지도자 밑에서 동맹을 맺고 싸우는 동맹체제로는,
강한 왕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치르는 팔리스티아를 대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항구적으로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해 줄 왕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4) 세계 최초 입헌군주제 도입.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대항할 효율적인 전쟁 지휘권 확립을 위해 왕정체제를 수립했습니다.
기원전 1050년에 12지파에 의해 세워진 입헌군주제는 세계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 뒤에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다른 나라의 왕과는 개념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율법 아래 선임된 왕들로 곧 입헌군주제 하의 왕들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쥔 왕이 아니라 왕도 일반 시민처럼 사법적,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대상이었습니다.
왕도 법의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다만 신의 대리자일 뿐 신이 친히 당신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기원전 1050년에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원래 ‘벤자민 지파’에 속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농부의 아들이 왕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잘생긴 젊은이로서 지파의 영웅으로 부상했던 인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고 계속해서 벤자만 지파에서 왕이 선출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혈통에 의해 왕이 세습되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율법에 합당한 능력자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을 이어 필리스타인인 거인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윗이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