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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한 유대인

2. 동방무역으로 되살아난 유럽 경제와 유대인의 금융업

by 김병훈

2. 동방무역으로 되살아난 유럽 경제와 유대인의 금융업


원래 동방무역이란 고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페니키아인과 유대인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중세 전반에 쇠퇴했다가 10세기 말부터 상업의 부활로 다시 성행했습니다. 동방무역은 서구 기독교 세계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이슬람 세계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합작품입니다. 이들 양대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무역이 곧 동방무역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쪽을 유일하게 잇는 끈이 유대인이었습니다.


(1) 무역을 지원할 금융이 발달하다.


11~12세기에는 상업혁명이라 불릴 만큼 해상무역과 상권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이 횟수를 더해 갈수록 해상운송과 해상무역은 더욱 증대되었고 이를 뒷받침해 줄 금융업도 발전했습니다. 무역과 금융업은 실과 바늘의 관계였습니다. 무역을 토대로 돈을 번 유대인들은 기독교에서 금지했던 대부업을 발전시켜 금융 산업을 일으켰습니다. 상인들은 처음에는 환어음을 취급하다가 전적으로 금융 성격을 띤 어음을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상인들에게 대부하다가, 왕족과 귀족들에 대한 대부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상업자본이 은행을 형성했습니다. 이후 무역금융은 해상보험으로 발전합니다.

유대인들은 대규모 금융업을 영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유럽 내 각국 왕실의 자금줄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이후 유럽이 세상에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은 금융 산업의 덕이었습니다.

상업 활동을 통해서 부를 일군 상인들에게서 금융이라는 부의 축적과 증식 방법이 개발되고 체계화되면서 유럽을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 커뮤니티 간의 정보교환으로 부를 일구다.


유대인 랍비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커뮤니티 간에 일상적으로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종교상의 의문점을 묻고 답하기 위해 또는 크고 작은 전통과 관습의 대소사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 편지에는 현지 사정과 변화 들을 자세히 기록해 다른 커뮤니티에 전달되었습니다.

유럽의 랍비들은 어디에 밀이 모자라 값이 오르고 있고 어디에 밀이 비축되어 가격이 안정되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말, 갑옷, 소금, 포도주 등 모든 상품에 대해 그랬습니다. 그들은 상품이 장소를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정보교환은 상품 정보만이 아니었습니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 등 환시세의 변화도 함께 알 수 있었습니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어느 곳은 1 : 12였고 어느 곳은 1 : 14 또는 1 : 15~16 하는 외딴곳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서로 옮기기만 해도 돈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당연히 유대인은 그 차액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돈’을 상품으로 본 민족입니다.


3. 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한 유대인


르네상스 1400년부터 1530년간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말합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한 마디로 神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원죄를 지고 태어났다’라는 신학적 사상 대신 ‘인간도 고귀하다’라는 휴머니즘을 회복한 것입니다. 미술로부터 시작된 휴머니즘 구현은 문학과 학문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근대로 접어듭니다.


피렌체에서 개화된 르네상스 문화운동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했으며 근대 유럽 문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을 지적인 민족으로 인정하고 직접 유대인을 르네상스에 참여하도록 해 흡수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부터 철학, 과학, 의학, 수학 등을 배웠으며, 당시 유대인은 농업만 빼고 모든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유대 여성의 사회활동도 활발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막대한 돈이 있어 귀족과 함께 미술가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훌륭한 건축가를 고용해 건물이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설계했습니다.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에도 웅장하고 화려한 르네상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번역과 전파는 물론 르네상스 운동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4. 십자군 운동과 중세 유대인의 학살


11세기 말, 유대인에 대한 핍박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십자군이 소집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이단은 다 공격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후 200년가량 지속된 십자군운동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참한 운명을 자아낸 공포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유대인들은 학살되었으며, 특히 대부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채무자들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되었습니다. 1078년 유대인을 공직에 고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선포되었고, 1216년에는 일련의 반유대 칙령을 제정해 유대인 식별 마크 착용을 의무화했습니다.

악마의 뿔을 상징하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노란 마크를 유대인 가슴에 붙이게 한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은 열등한 종족이어서 머리와 가슴에 부끄러움의 표지를 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세의 노란색은 멸시받는 자의 색이었습니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조롱과 냉대와 혐오의 대상이며, 가난과 공포와 절망의 대명사로 근근이 생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600년 동안 유럽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존재는 경제적인 이용물일 뿐이었습니다. 십자군 운동이 8회에 걸쳐 일어났던 1096년부터 1306년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서유럽 국가들에서 온갖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1290년 영국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는데, 그들이 옮겨간 곳이 플랑드르 지방 브뤼헤로, 그 뒤 브뤼헤 경제는 무섭게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1306년에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가 9년 후에 귀환령이 떨어졌습니다. 유대인은 어디까지나 착취의 대상으로, 필요 없으면 내뱉고 필요하면 받아들이곤 한 것입니다. 1348년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돌면서, 유대인들이 사탄과 연합해 행한 짓이라는 선동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4세기 후반독일의 유대인들은 도시 내 한 구역에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게토’라는 유대인 거주지역은 도시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각 도시에서 유대인 추방이 잇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13세기 영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차례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이후 지중해 연안에서 북부로의 상권 이동이 유대인 이동과 밀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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