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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산업혁명 토대를 구축하다

1. 해적의 나라 영국이 세계 최강이 되기까지

by 김병훈

1. 해적의 나라 영국이 세계 최강이 되기까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전제정치로 영국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으로 치달아 1645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선포하고 유대인의 이주를 허용했습니다. 이후 크롬웰이 사망하고 네델란드 왕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자, 네델란드 유대인이 대거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에 의해 네델란드를 부흥시켰던 현대적인 사업방식도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로써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인 금융산업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1) 크롬웰의 영국, 유대인을 반기다.


영국이 처음부터 대국의 면모를 갖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영국 귀족들은 상업을 천시하고 중세 기사들처럼 용기 있게 적을 공격해 당당하게 이익을 얻는 정복 활동을 찬양했습니다.

17세기까지 영국 상선은 해적선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물론 포르투갈이나 네델란드에게도 밀리는 변방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그로부터 200년 후 5대륙 45곳에 식민지를 건설해 세계의 통치자가 됩니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을 통해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제를 설립했습니다. 크롬웰 시대에 영국에서는 실용주의가 대두했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대대적인 추방을 당한 후에도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영국에 들어왔으며,

1630년 무렵에는 유럽 대륙의 부유한 유대인들이 영국 정부의 비공식 요청으로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후 유대인은 물 만난 고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청교도 정신이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는 구약성서의 정신을 이어받아 구약성서에서 신을 찾았습니다. 청교도가 ‘유대인의 신파’라고도 불립니다. 청교도와 유대교는 부를 인정하고 부자가 돼도 좋다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다만 유대교에서는 부는 인간을 교만하게 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으며, 금전욕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의와 부패를 이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2) 민간 소유의 중앙은행 탄생.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주축이 된 금융가들은 왕에게, 돈을 모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 허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제안은 상인들이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모아 주식회사 은행을 세우고 이때 모은 자본금을 모두 국왕에게 대부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상인들은 출자액만큼 은행권으로 교부받아 지불수단으로 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로 빌리는 대신 이자만 지급하고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영구채무로 하기로 유대인들과 협상했습니다. 은행권 발권력 부분만 제외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상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 금융 권력이 주도해 세운 민간은행이 은행권에 대한 독점 발권력을 소유하고 중앙은행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3) 유대인, 고객만족경영으로 세상을 바꾸다.


유대인의 세력이 커지자, 영국은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소매업’에 종사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유대인들은 도매업, 유통업, 무역업, 은행업, 재정 분야에 주력했습니다. 특히 금융 분야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더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견제받았는데, 그들의 특징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그들은 ‘혁신’을 생활화했습니다. 둘째, 판매의 중요성을 늘 강조합니다. 셋째, 가능한 넓은 시장을 추구했습니다. 넷째, 가능한 상품의 가격을 낮추려고 애썼습니다. 다섯째, 유대인들은 상업 정보 수집과 활용에 정통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몰려오면서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영국인들은 이후 유대인 유치에 더 열을 올렸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확산과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유대인의 자본력과 저금리의 금융 지원은 큰 역할을 해 영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쥘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자, 영국 경제가 무섭게 발전하기 시작해 마침내 유럽 제1의 무역국이 되었습니다. 경제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이동했습니다.


(4) 설탕과 노예무역이 키운 영국의 자본주의.


대서양 무역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삼각무역’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공산품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들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는 설탕이 실려 갔습니다.

당시 설탕은 흰 화물로, 노예는 검은 화물이라 불렸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설탕 산업입니다. 18세기 후반면직물산업이 발전하기 전까지 자본축적에 요긴한 사업이었습니다.

설탕은 세계 자본주의 성장과 깊이 관련된 역사적 작물입니다. 또한 설탕은 유럽인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 와 17세기 이후 커피나 홍차 같은 음료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 했습니다.


이러한 설탕의 대중화를 가능케 해 준 것이 흑인 노예였습니다. 사탕수수 농사에는 일손이 많이 부족 했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통해 신대륙 흑인 노예들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설탕 외에도 면화, 담배, 커피 등 플랜테이션 농장 재배 품목이 늘어나면서 흑인 노예의 수요도 증가했습니다. 노예무역은 16세기에 본격화해 19세기 중반까지 300년간 유지되었는데, 그동안 흑인들은 아메리카로 팔려 가 혹독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 노예들이나 유럽 제당 공장의 노동자들은 무덥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새벽 3시부터 하루 17시간의 노동으로 혹사당했습니다. 이러한 노예무역에 영국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 자본형성의 3분의 1은 노예무역에 의한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18세기 말에 정점에 이르렀는데, 노예 대부분은 서아프리카 내륙에서 벌어진 약탈 원정에서 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약탈 원정은 보통 아프리카 부족의 왕이나 추장들이 실시했습니다. 사실 유럽인들은 질병과 아프리카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두려워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매입할 때는 보통 럼주, 화약, 직물 등을 추장에게 지불했으나 1750년 이후에는 노예 수렵에 의한 약탈로 이루어졌습니다.

1771년에는 영국 노예무역선의 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연간 47,000명을 운반했습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아메리카로 실려 간 아프리카인은 1,500~2,0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중남미와 서인도제도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 나갔고 나머지 645만 명은 오늘날의 미국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1860년 미국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40만 명이 노예 400만 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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