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원한 금융 황제, 로스차일드
1. 영원한 금융 황제, 로스차일드
유대인 역사의 클라이맥스는 사실상 로스차일드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 유대인이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가 이후로는 독일계 아슈케나지가 유대인 사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대규모 금융산업을 일으킨 로스차일드 가문을 알지 못하고는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1) 본격적인 국제 유대자본의 태동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1744~1812)가 본격적으로 국제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9세기 초였습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국내적으로는 대자본이 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는 무역 증가에 따르는 대금결제 필요성이 증대되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유럽이 나폴레옹전쟁에 휩쓸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창의성이란 원래 평화로운 시기보다는 비상시에 더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로스차일드는 10대를 갓 벗어난 다섯 아들을 유럽 5대 도시에 보내어 어음결제 은행을 세웠습니다.
프랑크푸르트, 빈, 런던, 나폴리, 파리에 은행을 세우고, 은행 이름을 ‘로스차일드 상사’라고 하였습니다. 메디치가 이후 최대의 민간 ‘다국적 은행’입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어려서부터 명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랍비로 키우려 했습니다. 열 살에 랍비 양성학교에 들어간 그는 부모가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해 3년 만에 학업을 중단했지만, 랍비가 되기 위해 받은 교육, 특히 <탈무드> 교육은 그를 훗날 세계의 금융업자로 우뚝 서게 하는 지식과 지혜의 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하노버에서 ‘오펜하이머’란 유대계 은행에서 일하면서, 은행업을 <탈무드>의 시각으로 조망하고 종합하며 금융업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2) 고물상 물려받아 환전소 개업하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7년간 다양한 유형의 금융업을 체득한 뒤 1764년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던 고물상 겸 골동품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여기에 대부업을 추가하는 한편 동전(古錢)을 수집하는 부유층을 상대로 옛날 동전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장사는 부자를 상대로 해야만 많이 남는다는 기본적인 유대인의 상술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독일 빌헬름 왕자와 인연을 맺고 거래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이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일 내 왕국이나 공국들이 서로 다른 화폐를 쓰는 것에 착안해 게토 안에 환전소를 열었습니다. 독일 안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화폐를 교환하는 일종의 초보적인 형태의 은행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환전해서 얻은 이익금으로 좀 더 진귀한 동전과 골동품 수집에 투자하면서 일류 갑부들을 그의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좋은 상품을 경쟁자들보다 훨씬 저렴하게 팔아 신용을 얻은 것입니다.
빌헬름과 그의 재무관인 부데루스가 마이어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긴밀해졌고, 1769년 ‘어용상인’이 되었습니다. 궁전과 거래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며, 마이어는 특별허가를 얻어 자기 가계에서 세금을 걷는 대행업을 하는 동시에 소규모 금융사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이어는 17세의 신부 구텔레를 아내로 얻어 스무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열 명은 일찍 죽고, 다섯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평소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유대인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장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5000년의 역사요, 두 번째는 머리라는 것이었습니다. 5000년의 역사는 수많은 지혜의 축적을 의미하며, 이러한 5000년의 영광의 역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머리라고 했습니다. 마이어는 아무리 개개인이 총명하더라도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집단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아들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는 협상 능력보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항상 먼저 스스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이어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었습니다.
(3) 국제 어음결제 거래를 시작하다.
헤센 카젤 공국은 용병 장사로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남부 독일인들이었는데 경작할 땅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계속 일어나지 않으면 실업자 신세입니다. 1775년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헤센 공국의 빌헬름 공은 휘하의 군대를 영국 측 용병으로 파견했습니다.
이때 마이어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빌헬름 공이 용병 파견 대가로 수취한 영국은행 어음을 영국 맨체스터 섬유업체에게 결제해야 할 금액과 연계시켰습니다. 즉 맨체스터 섬유업체가 독일 로스차일드 은행으로부터 지불받을 돈을 영국은행이 발행한 어음으로 대체토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빌헬름 공과 로스차일드 은행이 부담해야 할 환전수수료를 서로 아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국가 간 어음 결제를 시작해 재미를 본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가 간 어음결제 금융거래를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4) 셋째 아들 네이션, 금융업에 진출하다.
빌헬름 공이 독일 헤센 공국의 왕위를 승계해 빌헬름 9세가 됐으며, 엄청난 유산도 함께 상속받았습니다. 그간 신임을 쌓은 마이어는 ‘최고’ 궁전 상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격 때문에 영국의 섬유도매상들과 매일 싸우던 마이어는 1797년 셋째 아들 네이션을 맨체스터로 보냅니다. 직거래를 시도한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일가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마이어는 국제적 금융 사업에 그의 아들들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마이어의 다섯 아들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사람은 셋째인 네이션이였습니다. 영국에 온 네이션은 당시 초기 산업혁명의 시발지이자 목화산업의 중심지인 맨체스터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네이션의 직물 직거래 방식은 3개월 신용거래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제조업 유통에 금융거래가 도입되었다는 뜻입니다. 점점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그는 직물산업보다 금융업이 더 많은 안정된 이윤과 폭 넓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803년 네이션은 영국에서 금융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안정적이고 이윤이 큰 영국 정부의 전시 공채 산업에 참여하기 위해 맨체스터와 런던을 오갔습니다. 나폴레옹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당시 영국 정부는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팔아야 했습니다. 이미 직물업계의 환어음 거래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던 그는 신용이 생명인 국제 환어음 인수 가문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아예 주무대를 런던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금융업을 시작했습니다. 금융업 가운데서도 채권, 금, 주식 거래가 그의 전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