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국 산업사의 양대 축, 모건과 록펠러

1. 남북전쟁 중 미국 최고 재력가로 부상한 제이피모건.

by 김병훈

1. 미국 산업사의 양대 축, 모건과 록펠러


미국의 산업사는 유대 재벌의 산업사입니다. 또한 제조업의 부흥과 동시에 금융자본주의가 태동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대공황 직후 제이피모건과 록펠러의 자본금은 776억 달러 대 449억 달러로 7대 4 비중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전 산업이 두 가문 손에 양분되었습니다. 19세기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산업과 경제의 토대를 구축한 제이피모건과 록펠러의 활동상을 추적해 보고 이들 유대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과 요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미국의 산업과 자본주의의 태동.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동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세계 각국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파트너로 해 대규모 무역업을 주도해 큰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이러한 자본 축적은 곧 금융 산업을 태동시켰고 맨해튼에는 제조업과 무역업을 지원하기 위한 금융 산업이 월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자리 잡아갔습니다.

제이피(JP)모건의 역사를 알면 미국 금융과 경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금융계를 지배해온 최대 실력자이며, 금융 이외에도 철도, 철강, 통신, 영화 산업 등 실물 경제에서도 패권적 지위를 행사해 온 실세였습니다. 한 마디로 미국 근대 산업사 그 자체입니다. 제이피모건은 창업주 존 피어폰트 모건의 약자입니다.

그는 코네티컷주에서 1837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 몰젠스턴이 유대인이지만, 제이피모건은 개신교를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귀환법에는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 됩니다. 유대인이란 말은 대체로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유대 민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2) 남북전쟁 중 미국 최고 재력가로 부상한 제이피모건.


제이피모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직물공장면화 브로커 사업을 운영하며 보험업부동산 투자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금융계에 진출한 제이피모건은 1861년 남북전쟁으로 촉발된 초호황 국면을 활용해 순식간에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24세였던 제이피모건은 북군이 폐기 처분한 소총을 3.5달러에 사서 약간 손을 본 다음 남군에게 22달러에 거래에 가담했고, 금을 매집해 가격을 끌어올리는 수법으로 수천억을 벌기도 했습니다. 모건은 전세에 따라 남군과 북군에 투자해 잠깐 사이에 수십만 달러씩 돈을 벌었습니다.

군수산업과 금융업이 융합한 위력이었습니다. 4년간의 전쟁이 끝나자 제이피모건은 미국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했습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제이피모건 시대가 본격 개막되었습니다.


(3) 제이피모건, 빠른 정보에 주목하다.


1844년 5월 24일, 세계 최초로 전신기를 통해 종이테이프에 찍힌 역사적인 메시지는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은 정보통신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느꼈습니다.

인간은 소리와 같은 전통적인 정보 전달 수단 이외에, 전기를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곧 전신을 창안했습니다. 전신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주식의 변동, 시장가격의 변화, 열차 출발시간, 정치적 사건, 전쟁 소식 등 멀리 있는 곳의 소식을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속도로 전달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통신망이었습니다. 이 전신소가 위치한 곳이 바로 전국의 철도망에 점점이 박혀있는 철도 역사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융인에게는 빠른 정보가 곧 돈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은행이 철도업을 장악하면 자동적으로 전신망도 지배해 생생한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정보는 곧 돈으로 이어졌습니다.


(4) 제이피모건, 로스차일드와 손 잡다.


1866년 대서양 해저 케이블 완성으로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의 거리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특히 로이터 통신 등 통신사의 발달월스트리트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은 자신들의 신용으로 정부 채권을 인수해 런던에서 유통시키는 등 해외 진출을 활발히 했습니다. 제이피모건도 32세 때인 1869년 런던에 건너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합의 결과, 노던증권을 설립했습니다.

이로써 제이피모건은 세계 최대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금을 대규모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로스차일드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 미국 산업과 금융에 투자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5) 모건과 에디슨의 만남, GE의 탄생.


1878년 여름, 에디슨은 가스등을 대체할 전기 등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강렬한 아크 불빛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의 실행 가능성을 실험한 것입니다. 기본적인 문제는 등이 지나치게 가열되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이피모건이 본능적으로 사업 가능성을 직감하고 합작회사 설립을 제의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대 기업 GE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78년에 설립한 ‘에디슨전기회사’가 그 모태입니다.

제이피모건은 평생에 걸쳐 1,000여 개의 발명품을 쏟아낸 에디슨을 통해 부를 늘렸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벤처캐피털리스트였던 셈입니다. 전등발전소가 에디슨에 의해 발명되었다면 이를 실용화해 전기를 대량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모건의 자본력이었습니다. 1913년 미국의 금융사와 산업사와 궤적을 같이했던 전설적인 인물 제이피모건은 이집트 여행 중 얻은 병이 악화되어 요양 중이던 로마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뒤를 이어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아들 잭 모건이 제이피모건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대도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잭 모건은 축재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제이피모건상사를 전시 자금 조달무기 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습니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 공급 사업을 같이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듀폰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우고 화약류를 대량 생산해 유럽에 공급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쟁 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전시 자금 조달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잭 모건입니다. 잭 모건은 영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미국 채권을 월가에 팔아 주었고, 이 과정에서 잭 모건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영국은 채무국 관계가 역전되었습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산업은 기록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무역 흑자 규모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유럽 각국의 정부와 지방 정부 그리고 기업들이 월스트리트로 몰렸습니다.

이로써 런던의 ‘더 시티’는 과거의 위상을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대인이 시작한 세계 금융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