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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유 시장을 석권한 록펠러의 등장

2. 등유에서 시작하여 가솔린과 중유의 시대로.

by 김병훈

2. 세계 석유 시장을 석권한 록펠러의 등장


바위를 뚫는 사람이라는 뜻의 록펠러(Rockefeller)란 성은 원래 독일계통의 성인 로겐펠더를 미국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독일계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油田이 있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을 때 히틀러는 이를 유대인의 공작 때문이라고 공격했는데, 이는 록펠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록펠러가 독일을 압박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그런 판단은 나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에서 약품 판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53년 오하이오로 이사간 후에는 거기서 자랐습니다. 록펠러는 어렸을 때부터 칠면조나 사탕을 팔아 이윤을 남기면서부터 돈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문대학의 비즈니스 코스에 들어가 3개월 만에 과정을 마치고 조그만 곡물위탁판매회사의 경리사원 보조로 취직했습니다.


(1) 록펠러, 석유의 가능성을 보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처음으로 시추 석유가 나왔습니다. 석유 시추 현장 책임자인 에드윈 드레이크는 기계 굴착 방법으로 암반 밑 21m까지 뚫어 유전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드레이크의 성공을 계기로 석유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원유를 등유로 바꾸는 정제시설도 들어섰습니다. 사용처도 불분명했던 석유 개발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던 이유는, 골드러시 열풍을 대신할 절호의 기회를 석유가 가져다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남북전쟁 중에 석유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석유업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석유를 찾는 일보다는 석유의 파급효과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석유는 채취한 그대로의 광유(鑛油)를 등화에 사용했을 경우 매캐한 연기와 냄새를 발산했으며 그다지 밝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증류해 정제해서 등유를 만들면 밝은 빛을 냈습니다.


석유에서 증류해 낸 등유는 석탄에서 추출한 가스와 달리 폭발 위험도, 소음도 없었을 뿐 아니라 파이프를 설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원하는 장소 어디든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등유 램프는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정유회사들은 검은 액체를 정제해 주로 램프용 등유를 만들었고 저렴한 양질의 등유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시장수요를 충족시켰습니다. 본격적인 ‘정유시대’였습니다.


(2) 록펠러의 선택, 철도회사와 승부보다.


석유의 잠재 가능성을 확인한 록펠러는 진짜 돈은 석유 채굴업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인이 번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1863년 그는 곡물중개회사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했습니다. 물론 정제시설이란 건 뒷마당에 설치된 과학 실험실 정도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석유가 산업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가능성이 보이자, 그는 유전개발에 뛰어들기보다는 한 수 앞을 내다보고 부가가치가 더 높은 정제공장을 차린 것입니다. 록펠러는 정유사업에서의 관건을 물류비용이라고 보았습니다. 경쟁자보다 물류비용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사업 성공의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록펠러는 철도회사에게 일정한 원유 수송량을 보장해 주는 대신 운송료를 깎아달라는 협상을 벌였습니다.

철도회사와의 운송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 정유공장을 흡수 합병하는 전략을 짰습니다. 1870년 1월 1일, ‘스탠더드오일’이라는 회사가 탄생했습니다. 스탠더드(균질)란 회사 이름 자체가 고객 지향적이었습니다.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였고, 미국 최초로 중역회의제도를 실시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투자자들은 회사 부채에 책임을 지지 않는 주식회사에 거리낌 없이 투자했습니다.


(3) 석유, 중요한 수출품이 되다.


1861년 12월 미국의 석유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원유에서 얻어진 등유가 등화용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등유 램프 사용이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어, 원유의 공급과잉이 되었고, 원유가격이 폭락하여 많은 석유회사들이 파산했습니다. 생산과잉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수출이었습니다. 석유 사업에 유럽과 러시아도 뛰어들었습니다. 이때 노벨 형제와 로스차일드 은행은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과 타협해서 유럽 시장을 양자가 분할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1907년에는 영국과 네델란드 자본으로 국제적인 거대석유회사 ‘로열더치쉘’ 그룹이 탄생했습니다. 그동안 석유는 주로 등화용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등유의 용도가 난방용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4) 가솔린과 중유의 시대로.


등유를 생산하게 되면 불태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잉여제품’ 즉 휘발유와 같이 폭발의 위험성이 있는 것과 중질유분(重質溜分)이라고 부르는 끈적끈적한 제품이 부산물로 생산됩니다. 이런 석유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 가솔린과 중유입니다. 1886년 칼 벤츠가 휘발유 자동차를 보급하기 시작하자 가솔린의 가치가 치솟았고 점차 가솔린과 등유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1903년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하고, 리잍트 형제가 12마력의 휘발유엔진에 프로펠러를 장치한 글라이더로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휘발유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치 없고 귀찮은 부산물로 간주되던 휘발유는 불과 수년 사이에 원유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석유제품이 된 것입니다. 석유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탠더드오일이 단단한 독점체제를 유지하는 동안 등유 가격은 80% 이상 인하되었고 품질 혁신은 물론, 산업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5) 록펠러, 세계시장 거머쥐다.


록펠러는 미국 내 정유업계를 평정한 후 목표대로 세계시장을 거머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시장에도 손을 뻗어 국제 독과점기업을 형성했습니다. 세계 진출은 계속되어 세계 80개국 이상에서 사업 활동을 하면서 70개 이상의 정유시설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 같은 스탠더드오일 후예 기업의 하나인 ‘모빌’을 흡수해 ‘엑소모빌’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이로써 로열더치쉘 그룹을 누르고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이 되었습니다. 록펠러의 독점에 대한 꿈은 석유산업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탠더드오일은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지배하는 지주회사로 개편되어 은행, 선박, 철강, 석탄 등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사업 확대에 따라 철광산, 삼림 등을 지배하기 위해 제조, 운송업 등 수십 개 회사를 거느렸습니다. 그는 전 세계 지구상의 유전에 대한 독점적 지배에 표적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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