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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움직이는 오늘날의 유대인들

3. 유대인을 대표하는 금융계 인물들의 활약상

by 김병훈


3. 미국을 움직이는 오늘날의 유대인들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미국 투자은행의 역사는 인수합병으로 점철된 역사입니다.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미국 투자은행들은 덩치를 키우고 대형화된 자본력과 인력으로 시장을 지배해 왔습니다. 현재 월가를 움직이는 유대인을 통해 오늘날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계 금융 산업의 실체를 파헤쳐보고, 현재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환율전쟁의 면면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돈줄언론을 쥐고 있는 유대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시티그룹, 미국 최초의 금융백화점.


전통적으로 월가의 대표 선수는 시티그룹입니다. 그 역사를 보면 로스차일드, 록펠러, 모건 등을 합친 유대계 금융기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티그룹은 1812년에 창업한 시티뱅크 오브 뉴욕이 그 전신입니다. 유대계 금융 대부호들이 단계적으로 대주주로 참여하면서 1976년 ‘시티코프은행’이 탄생했습니다.

1998년 트레블러스그룹과 시티코프은행이 합병되면서 세계 100여 개국에 지점망을 갖고 있는 다국적 은행과 증권회사, 보험회사, 자산운용회사, 신용카드회사가 모두 시티그룹을 상징하는 빨간색 우산 아래 모였습니다. 시티그룹은 소비자금융, 기업금융에서 증권, 보험까지 ‘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루는 미국 최초의 금융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샌디 웨일 전 시티그룹 회장은 ‘금융황제’, ‘금융제국의 사냥꾼’으로 불립니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정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폴란드 유대계인 그는 1933년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태어나 신문배달을 하면서 군사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뒤 명문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유대계 투자은행에 메신저보이로 취직했습니다. 그의 꿈은 브로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 동갑내기 3명과 함께 증권투자자문회사를 차렸습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던 1970년 그는 눈여겨보던 하이든 스톤을 인수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합병의 귀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합병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원래 합병은 업종 간 통합으로 발생하는 시너지효과위험자산을 담보할 덩치 키우기가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업종 간 칸막이 제거로 오히려 부실과 위험의 전이가 빨라져 더 위험해진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 제이피모건체이스, 월가 제1의 종합금융그룹.


2000년 말 제이피모건체이스맨해튼이 합병되었습니다.

체이스맨해튼의 원래 모체는 1799년 설립된 맨해튼상수도 회사였는데 은행업을 할 수 있도록 인가를 받아, 은행 영업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1808년 맨해튼상수도 회사는 상수도 시설을 市에 매각하고 은행 업무로 전업했습니다. 체이스내셔널은행은 록펠러 주니어의 처남이 회장을 맡은 록펠러가의 금융기관이었는데, 1955년 맨해튼은행과 합병해 ‘체이스맨해튼은행’이 되었습니다.

2000년 9월 제이피모건을 인수하면서 ‘제이피모건체이스’가 되었습니다. 이 합병으로 투자은행과 소매금융에 치중하면서 종합금융그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2004년 1월 제이피모건체이스와 뱅크원이 합병을 선언하면서 뱅크원의 최고경영자 제임스 다이먼이 시티그룹에서 쫓겨났다가 화려하게 월가에 재등장합니다.

월가의 진화법칙은 생존입니다. 그 방법은 인수합병, 처절한 구조조정, 또 다른 인수합병입니다. 웨일 시티그룹 회장과 다이먼 등이 벌인 일련의 합병은 지난 50년 동안 미국 금융시장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줍니다.


(3) 골드만삭스, 유대계 자본의 상징.


골드만과 삭스는 독일계 유대인들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전·현직 최고경영자들이 모두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골드만삭스는 세계 투자은행(IB) 시장의 절대강자이며, 동시에 전 세계 금융인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기도 합니다. 고객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 나보다 우리를 내세우는 기업문화, 헌신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세계 최고의 인재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이끄는 우수한 경영진, 이것이 대부분 국가의 금융회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골드만삭스의 성공 비결입니다.


골드만삭스 창립자 마르쿠스 골드만은 원래 펜실베이니아에서 의류점으로 사업을 하다가 금융업으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는 사업 초기에 챙이 큰 실크모자를 쓰고 기업어음을 사서 뉴욕의 상업은행에 팔았습니다. 장사가 잘되자 1882년 사위를 파트너로 끌어들여 골드만삭스를 창건했습니다.

이러한 가족 중심적인 경영은 향후 골드만삭스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기업공개는 창사 130년 만인 1999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전통적으로 기업의 인수합병을 관할하는 투자은행증권업무 중심이었던 골드만삭스는 지속적인 사업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트레이딩 및 직접투자 분야를 크게 확대해 나갔습니다. 특히, 채권, 통화, 상품을 뜻하는 FICC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2012년 골드만삭스의 수장인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뉴욕 브롱스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가진 것이라곤 뛰어난 머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로펌에서 첫 직장을 잡고 골드만삭스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골드만삭스가 상품 트레이딩을 강화하기 위해 제이아론을 인수하는 바람에 그는 ‘뒷문’으로 골드만삭스 직원이 되었습니다.


(4) 투기판의 살아 있는 전설, 조지 소로스.


하루 세계 외환거래액 4조 달러가 넘습니다. 그 가운데 수출입 대금결제와 실수요에 쓰이는 돈은 1% 미만입니다. 나머지 99%는 핫머니입니다. 핫머니의 대부분은 글로벌 자본시장과 자산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래로 거의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거래입니다. 이러한 투기거래에서 단연 살아 있는 전설적 인물이 조지 소로스입니다. 그가 운용한 헤지펀드의 실적은 30년 동안에 원금의 5,300배 이상 불렸습니다.

이것은 20세기 최고의 투자가 워런 버핏을 웃도는 성적입니다. 원래 헤지펀드는 금융 감독기관이나 증권거래소에 등록할 필요가 없는 사적 투자 파트너십으로서, 여러 시장과 상품에 투자하는 펀드입니다.

펀드의 구성은 보통 100만 달러 이상의 투자자 100명 이내로 구성됩니다. 등록할 필요가 없으니, 공시의무도 없으며, 기존 투자에 대한 투명성 제공 의무도 없습니다.


‘소로스’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1992년 9월 16일 파운드화 폭락 사태 때입니다. 이른바 ‘검은 수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파운드화의 가치는 순식간에 20%나 떨어졌습니다. 이때 소로스가 2주 만에 얻은 이익이 10억 달러에 이릅니다. 최단 시간에 가장 많이 번 기록입니다. 이는 ‘철저한 연구와 분석’, ‘과감한 투자’, ‘발 빠른 후속 조치’ 세 가지로 요약되는 소로스 투자기법의 전형입니다.

소로스는 젊어서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주식, 채권, 외환은 물론 부동산, 원자재, 곡물 등에 투자해 천문학적 투자수익을 올리면서 세계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글로벌투자의 원조인 셈입니다.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대형 투기판에서도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까닭에 소로스는 훗날 주변으로부터 ‘냉정한 승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소로스의 돈에 대한 집착과 철학도 고난의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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