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형적인 GE 경영자'와는 180° 다른 사람.
3. GE에서의 치열한 승계 경쟁
(1) 큰 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
1977년 12월, 잭 웰치는 드디어 페어필드의 GE본사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지하 차고로 들어가 주차한 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넓은 복도를 지나 레그 존스(Reg Jones) 회장의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매우 조용하고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경직되어 있었으며, 그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페어필드 본사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GE를 떠나지 않도록 그를 설득했던 루벤 구토프는 1975년 후반에 이미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피츠필드의 공장 폭발 사고 때 도와 준 찰리 리드와 플라스틱 사업부에서 일했던 마이크 앨런이 본사로 옮겨와 전략기획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각자의 일로 매우 바빴습니다.
그를 가장 외롭게 만든 것은 페어필드에서 그에게 좋은 친구이자 후원자로, GE의 부회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험 웨이스가 일년 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본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5명의 친한 친구들과 일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수 효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업무에 파묻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승진과 함께 페어필드로 자리를 옮긴 일은 새로운 계층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이제 CFO인 알 웨이(Al Way), 전략기획담당 수석 부사장인 보브 프레드릭(Bob Frederick) 등 2명의 본사 스태프와 함께 공개적으로 레그의 후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5명의 섹터 총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레그는 우리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수십 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는 기술과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승계 과정의 일부로서 이 새로운 계층에 우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잭 웰치는 소비재 섹터를 이끌었는데, 그것은 레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년 전에 새로 만든 섹터였습니다.
결국 그는 회사 전체 매출의 20%인 42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사업부를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요 가전제품, 냉난방기, 조명기기, 소형가잔 제품과 오디오 제품, TV수신기, 랑디오 및 TV방송국과 GE크레디트 코퍼레이션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구조는 레그가 후계자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회장이자 새로운 직속 상관인 월터 데이브 댄스가 다른 회장 후보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스탠 골트를 지지했습니다. 스탠 골트는 댄스처럼 가전 사업부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댄스가 골트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는데 그것이 잭 웰치를 힘들게 했습니다. 골트가 전년도에 소비재 섹터의 책임자였다는 사실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의 부회장인 잭 파커 또한 다른 사람을 지지했습니다. 파커는 GE의 항공기엔진 사업부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고, 항상 그 사업부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지지했으며, 자신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벌링검과 후드를 신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톰 밴더슬라이스와 잭 웰치만 따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부회장이 회장인 레그와 별로 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츠필드에서 일했던 방식 그대로 이 새로운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페어필드의 새로운 사업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아침 7시 30분에 회의를 시작해서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문제를 파고들었습니다. 밤 8시나 9시전에 일이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날의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러한 논의들은 깊이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전사업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규모를 대폭 줄이고 확장 계획을 백지화했습니다.
회장직 승계 문제는 경마 레이스와 비슷했는데, 모든 기수와 말의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레그가 잭 웰치가 하는 일에 찬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 했습니다. 1975년 후보가 10명으로 좁혀졌고, 거기에 잭 웰치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 젊고 경솔해서 GE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회사의 전통이나 양식은 거의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레그는 후보자 자신 이외의 사람을 회장으로 추천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회장 후보를 심사했습니다.
레그와 그는 분명히 서로 달랐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 회사에서의 성공은 조직의 능력제일주의에 바치는 찬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숫자와 분석을 좋아했습니다. 레그와 그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의 참을성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1979년 8월에 레그는 잭 웰치와 벌링검, 그리고 후드, 세 사람으로 승계 경쟁의 후보를 압축하였습니다.
1980년 여름에 그는 주변에서 긍정적인 동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회로부터 첫 번째로 유력한 후보라는 암시를 받은 것은 1980년 9월에 GE의 이사 중의 한 사람인 에드 리틀필드가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골프대회에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레그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드는 많은 유력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고, 그 대회에서 홀인원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그가 CEO가 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레그는 1980년 12월 19일, 잭 웰치가 GE의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후드와 벌링검이 부회장으로 회사에 남을 것이며, 1981년 4월 1일에 공식으로 회장에 취임하며, 그날까지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도와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레그가 당시의 ‘전형적인 GE 경영자’와는 180°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매우 힘든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회장직에 오르게 되었지만 약간의 정치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파올로 프레스코는 본사의 복도에서 거의 육박전까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반대편이었지만, 세계의 정세에 밝은 프레스코를 받아들여, GE를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결정이 발표되는 순간 <월스트리트 저널>은 GE가 ‘전설적인 활동가’를 신임 회장으로 기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레그는 그를 재계의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2월 24일 뉴욕의 헴슬리 팰리스에서 데뷔 파티를 마련했습니다. 레그는 그의 인맥을 연결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기업의 CEO들이 모두 참석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모두 유쾌한 시간을 보냈고 멋진 파티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비로소 잭 웰치 앞에 길들이 환하게 펼쳐지는 것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