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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치식 경영의 시작 – 마침내 GE의 키를 잡다

1. ‘초대형 유조선’에서 ‘스피드보트’로 변모하는 문화.

by 김병훈

1. 마침내 GE의 키를 잡고 항해를 시작하다


(1) ‘초대형 유조선’에서 ‘스피드보트’로 변모하는 문화.


1981년 4월 1일, 잭 웰치는 마침내 CEO가 되었습니다.

그날이 있기까지의 풍부한 직장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고, 그를 아는 사람들도 그 당시의 그를 신념이 강하고 거만하며,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강인한 사람으로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는 외향적이고 활달해야 하는 CEO로서 자질이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기업 활동에 관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워싱턴의 누구와도 좀처럼 교류가 없었습니다. 언론 매체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도 그는 거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50만 명 이상의 주주들은 잭 웰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그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GE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문화였습니다. 그는 GE의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GE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규모에서나 신용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초대형 유조선’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는 GE가 보다 빠르고 민첩하며 수익성 높은 ‘스피드보트’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GE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운영되기를 바랬고, 날마다 힘겨운 현실을 돌파하는 자신감모험심이 넘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사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비록 GE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지만, 그는 작은 기업이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익성 높은 사업은 수익성 낮은 사업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는 GE가 개별 시장에서 1위 아니면 2위에 있는 사업 분야에만 전력투구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GE는 관료주의에 입각한 사업 방식에서 벗어나 훨씬 신속하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미국 내 다른 대부분의 기업들처럼 1980년 말 GE는 지나치게 많은 관리 계층이 존재하는 인습적이고 관료주의의 색채가 짙은 기업이었습니다.

GE의 문화 명령과 통제가 일반적이었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대다수의 본사 스태프들을 완전히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론 서로 친밀하고 아무런 갈등도 없는 척하지만, 그 이면엔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피상적인 일체감’ 속에서 살아왔다고 느꼈습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조직 내의 지나치게 많은 계층은 GE의 거대한 규모가 낳은 또 다른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스웨터를 너무 많이 껴입고 있는 모습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렇게 외출하면 바깥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직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조직과 건물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층은 한 단계의 계층을 의미하고 건물의 벽은 기능상의 장벽을 의미합니다.


조직에서 최고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직위와 업무에 상관없이 좋은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개방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계층과 장벽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본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는 그의 사무실 주변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전체 조직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업부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사업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업부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의 일에 대한 열성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생산 공장의 지게차 운전사들로부터 사무실을 가득 채운 기술자들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열정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과 제품 그 자체가 아니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관리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새로운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조직을 위해 봉사한 댓가로 주어지는 경력 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은 GE의 ‘우수한’ 기계를 주문한 고객을 오히려 ‘행운아’라고 간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긴 제품 수명과 주문 적체로 인한 발전설비 사업부의 길어진 사업주기는 적절한 페이스와 열정 에너지의 결핍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현장 방문을 통해 혁신의 계기로 삼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사업부를 발견하게 된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캘리포니아의 샌호세에 있는 원자로 사업부였습니다. 1960년대 컴퓨터 및 항공기 엔진과 더불어 원자력은 GE의 대표적인 벤처 사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컴퓨터 사업은 이미 매각되었고, 엔진 사업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고 원자로 사업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 웰치는 새로운 각도에서 ‘현실 인식’을 하였고, 그들에게 미국 내에서 원자로의 추가 주문이 없다는 가정에서 계획을 다시 수립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논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면서 ‘군살을 모두 도려냈다. 뼈가 드러나도록 더욱 깊이 도려낸다면 망한다.’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경영은 항상 원가라는 사과를 가장 적게 베어 먹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황기가 도래함에 따라 경영자들은 필연적으로 원가를 더 절감하기 위해 몸이 가뿐했던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이야말로 직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신속하고도 급격한 폭으로 원가를 줄였기 때문에 사업이 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호황기가 도래했을 때 직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CEO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잭 웰치에게 희열을 가져다주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그가 필요로 했던 기업을 경영하는 일종의 ‘직감’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원자로 사업부에서 혁신을 도모했던 사람들은 ‘전형적인 잭 웰치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젊지도 않았고, 소란스럽거나 반항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관료주의를 敵으로 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입신 출세자들이자 GE에서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웰치의 신봉자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 영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새로운 돌파구였습니다.

새로운 GE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거나 아니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상관없이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시장에서의 GE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또는 GE가 번창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조직 구성원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시점에서 그러한 메시지가 가지는 위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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