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실존주의 등장과 인간의 소외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15.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주의
사물이나 생물에 있어서 실존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습니다. 실존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할 것이냐?’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1)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
철학의 근본적인 물음은 ‘존재(存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존재는 자연 세계를 가리켜 왔습니다.
중세기에 와서는 神이 존재의 중심 과제로 떠올랐고 신과 무관한 존재는 논의될 수 없었습니다.
근세에 와서 자연은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신은 철학적 과제 밖으로 밀려 나갔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존재는 삶의 문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실존주의는 현대 특유의 사상입니다.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는 현대인을 위한 사상이며 동시에 유럽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합리론적 이성주의에 반대되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실존주의는 1946년 9월에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라는 강연을 한 후부터 갑자기 유럽 전역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실존이라는 말의 어원은 ex-sistere입니다. 즉 ‘밖에(ex)’ ‘나타난(sister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에 따라 짓게 됩니다. 설계도를 본질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실존주의에 있어서 집은 도면에서 파생된 제2차적인 의미의 집이 아닙니다. 즉 집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따르면 인간은 보통의 경우처럼 ‘인간’이라고 불리지 않고 ‘현존재’, ‘실존’, ‘對自的 自我’, ‘자아’ 등으로 불립니다.
하이데거는 특별히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릅니다. 구체적으로는 ‘거기에(Da)’ ‘있는(sein) 자’라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주관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내가 있다’ 또는 ‘네가 있다’와 같이 언제나 인칭을 수반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의 존재 방식에 늘 관심을 가집니다.
이렇게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문제 삼고 관심을 쏟는 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대자적 자아’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을 즉자(卽自, en-soi)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의식은 즉자 같이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하지 못하고, 존재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합니다. 즉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만 의식은 있습니다.
의식의 이런 성격을 대자(對自, pour-soi)라고 부릅니다. 즉자와 대자는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즉자와 대자와의 관계입니다. 대자는 존재의 결여이고 이 결여를 메울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메우려고 하는 대자적 존재인 것입니다.
(2) 실존의 기본 성격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진 실존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입니다. 인간은 우연에 의하여 세계에 내던져집니다.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의 존재(실존)에 의존합니다. 이 책상, 저 시계가 없어지면 다른 책상이나 다른 시계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은 그렇게 대체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실존 철학은 본질보다 실존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보편보다 개체를 중시하는 철학인 것입니다. 인간에 있어서 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 철학의 제1원리인 것입니다. 실존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과 자각을 가지며,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둘째,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한 ‘주체성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합니다.
(4) 실존주의와 인간 소외.
현대를 가리켜 기계와 기술의 시대라고 합니다. 인간은 기계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개성이 상실되고 우리의 인간성까지도 기계의 한 부속품쯤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발명된 각종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류는 파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가 특별히 20세기부터 강조되고 추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유로 인간 소외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운동은 기계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평균화하고 인간적 실존을 억압하는 데 대한 반항 운동입니다. 인간은 같은 시간대에 같은 매스컴을 보고 들으며, 인터넷을 통해 같은 내용의 정보를 접하고 있습니다. 개성이 무시되고 대중화, 평균화되어 인간은 점차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최후의 반항을 시도하는 것이 실존주의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현대가 불안의 시대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이제 ‘죽음에 이르는 병에 사로잡힌 절망적 존재’, ‘죽음에 이르는 존재’ 또한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상황의 묘사를 가장 적절하게 나타낸 것이 하이데거의 ‘던져져 있음’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소외 현상이 나타나고 불안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실존주의가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5) 실존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돈과 명예, 정치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절대다수의 삶의 목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소중하기는 해도 그 자체는 수단으로서의 가치, 예비적인 가치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예술가가 예술은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가치는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적 가치, 인격의 가치입니다. 인간적 가치는 결코 수단이나 방편으로서의 가치일 수 없습니다. 현대의 비극과 모순은 바로 이 가치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과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가 정치 · 권력의 수단과 방법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 소외, 인간 상실의 시대에서 인간의 심층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불안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 불안을 극복할 방편으로 실존주의는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나친 기대를 걸었다는 데 있습니다.
도대체 불안의 극복이라고 하는데 그 불안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불안의 근거는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숨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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