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과 박애주의자 – 조지 소로스

5. 투기꾼을 경멸하면서도, ‘위대한 투기꾼’이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

by 김병훈

5. 투기꾼을 경멸하면서도, ‘위대한 투기꾼’이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


조지 소로스는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반면, 무서운 금융 천재라든가 투기꾼 등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판도 듣습니다. 그는 조심성과 예측, 불신과 신뢰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내면화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그의 배짱은 오랫동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한 인간의 용기이기도 합니다. 삶에 대한 열망과 공포, 투기꾼 소로스는 바로 이러한 감정을 지닌 인간입니다. 조지 소로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내 판단은 다른 사람보다 썩 나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난 내 의견과 행동을 바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이론에 따라 행동합니다.


조지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치 점령기에 소로스는 여러 은신처에서 숨어서 지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2년 뒤에 영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친척집에서 자랐고 런던 경제학 스쿨에서 공부했습니다. 철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칼 포퍼의 강의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포퍼의 저작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의 사상과 이후의 박애주의적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52년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의 투자회사인 ‘싱어 앤 프리드랜더’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69년 투자기금협회인 ‘퀸텀 그룹’을 설립하였습니다. 수년 간 계속 성공을 거두면서 소로스는 수십억대의 개인 자산가로 부상하였습니다. 1992년 100억 달러로 영국의 파운드화에 환투기를 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파운드화의 시세가 떨어졌고 소로스는 미리 싼 값에 사들여 비축해 두었던 덕분에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였습니다. 1993년에는 프랑스의 프랑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환투기를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1995년 이탈리아의 리라화에 환투기를 하여 다시 성공하였습니다.


1997년 말레이시아 총리는 동남아시아 환율이 20%까지 급락한 책임이 소로스에게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소로스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닙니다. 부드럽게 표현해서 우리는 그를 ‘황금의 손’, ‘미다스 왕’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황금으로 변합니다. 프랑스의 어떤 은행가는 ‘옛날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참수형에 처했을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동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산가들 중 한 명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그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여깁니다.


우리는 모두 투기꾼을 경멸합니다. 하지만 약간의 투기는 아주 좋은 일이며 그렇게 위험한 일만은 아닐 것 같다고도 생각합니다. 우리가 위대한 투기꾼들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따라서 이들의 영향력은 더욱더 커지고 있습니다. 흔히들 소로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먹이 냄새를 맡는다고 말합니다. 사냥개는 본능에 따릅니다. 바로 여기에 소로스의 힘이 있습니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의 오만불손한 위력을 경멸합니다. 하지만 그를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또한 대중들입니다.

우리는 소로스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신비한 힘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성공을 하는 소로스는 이제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중얼거리며 내뱉는 한마디 말은 자본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 예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투기꾼들은 자신들이 벌어드린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냉혹합니다. 국가의 안녕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못 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일종의 카지노로 봅니다. 그동안 세계화가 되면서 그들의 활동 무대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투기꾼들은 세계 곳곳에 거대 자본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렇게 몰아대는 힘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지, 잃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바로 공포와 탐욕이랍니다.’ 공산 진영이 무너진 후 자본주의는 더욱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이런 자본주의의 모습은 여러 매체에 나타난 소로스의 풍자화와 닮은 꼴입니다. 악마화된 소로스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1979년 소로스는 ‘열린 사회 기금’으로 뉴욕에 그의 재단을 처음으로 설립하였습니다. 5년 뒤에는 헝가리에 ‘동유럽 기금’을 설립하였습니다. 1987년 소련에서 ‘소로스 기금’을 설립하였습니다. 현재 소로스 기금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30개국 외에도 아프리카와 하이티에서 활동 중입니다. 기금의 목표는 ‘열린 사회’의 토대를 구축하며, 이에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1989년까지 소로스는 약 3억 달러를 열린 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투자하였습니다.


소로스는 20세기를 공포로 몰아넣으면서 수백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던 두 이데올로기에 연거푸 희생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나치의 민족주의가 인종주의로까지 치닫자, 유대인 소로스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부모와 함께 지하 은신처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다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왔고, 이제 막 해방된 젊은 소로스는 런던으로 망명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며, 이들은 또한 조지 소로스의 적들이었습니다. 어떤 정권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 그에게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인종을 차별하는 세계를 떠나 보편적 이념의 세계로 피신했습니다. 소로스에게는 세계주의자가 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이 없었습니다. 소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결코 실천적인 유대인이 아닙니다. 세계 시민입니다. 나는 소수 민족이기 때문에 항상 다수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봅니다. 이것이 내 금융 사업의 기반이며, 심지어 생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유대인만은 아니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 소로스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소로스는 자유와 권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독립적이라는 것, 이게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이게 권력입니다. 그는 권력보다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집니다. 그의 자유가 줄어들었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현상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대변하는 어떤 관심사를 세상에 전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지도자라는 명성이 생기니까 말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전에는 그가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상황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돈의 힘이 자신이 가진 이념의 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1990년 소로스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두고 프라하, 바르샤바,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 분교를 둔 ‘센트럴 유럽 유니버시티’를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300명이 넘고 있습니다. 소로스는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특히 옥스퍼드(1980년)와 볼로냐 대학(1995년)에서도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그는 개인 투자회사인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단독 소유주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열린 사회’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참된 가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지 소로스는 모든 것을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조지 소로스는 항상 자신의 의견을 바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였습니다.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변화하는 세계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만 바라보는 사람은 끔찍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금융계에서나 정치 생활에서나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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